쾅!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까지 보였던 푸른 하늘은 온데간데 없고, 옆에는 온통 풀과 나무들 뿐이었다. 아, 또 져버렸구나. 느껴지는 것은 추락의 아픔보다도 몰려오는 좌절감과 져버렸다는 허탈함 뿐이다. 하늘을 바라보는 시야에는 붉은 리본을 한 소녀가 우아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나는 할 수 있어. 언젠가 최고가 되어, 모두가 내 이름을 불러줄 그 날이 올 거야. 내가 좋아하는 저 높은 하늘의 별처럼, 높은 곳에서.
그 소녀같은 상상과 바람은 내 추락과 함께 다시 한번 무너졌다.
“이걸로 끝?”
하쿠레이 레이무가 감정변화 없는 그녀의 가슴과도 같은 평평한 말투로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엉.”
힘없이 대답했다. 자신과 싸운 것을 그렇게 힘들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 그녀의 그 말투가 거슬려서인가, 자동적으로 나는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여긴 네 집이랑 가까우니까 알아서 찾아가고. 나도 피곤하니 빨리 차라도 한 잔 하러 갈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떠나갔다.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간 내 몸의 긴장은 순간 탁 풀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조차 없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에 절로 눈이 감겼다.
내가 뭐가 모자란 것인가.
처음엔 레이무가 괴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같은 인간 중에서도 대단한 녀석은 충분히 많았고, 그리고 이 환상향에서 ‘인간이라서’ 라는 말 따위, 어린애의 칭얼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다음엔 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노력했다. 그래도 부족하자 잠을 줄이고, 그 다음엔 또 뭘 할까 생각했다.
아니.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저 녀석을 뛰어넘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서 요괴 퇴치를 해도 레이무를 따라갈 수 없고, 아마 계속 그럴 것이다. 처음 맞붙었을 때부터, 그 대답은 충분히 알고있을 터였다.
그 때 나는 이 녀석에게는 절대로 탄막싸움이나 완력으로는 절대 이길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신 이렇게 저렇게, 녀석의 의뢰를 뺏어서 녀석을 약올리거나, 내가 대신 이름을 날리거나 하는 식으로 복수해주었을 뿐.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벌써 주황빛으로 물들고 밤이 시작될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 등에 묻은 흙을 털었다.
---
집에 돌아와 어두침침한 집안을 바라보았다. 집안에는 내가 모아둔 수집품들 말고는 아무것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건 처음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었으니까. 딱히 이제와서 새삼 감상적으로 되고싶진 않다. 일단 옷도 빨아야 되고.
오늘의 실험은,
일단 씻고나서 생각하자. 수풀냄새가 옷을 넘어 팔꿈치에서까지 느껴졌다.
욕조에 드러누워 온수의 안락함을 느꼈다.
바깥세계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편리한 도구들이 필요없어져 잊혀지는걸 보면, 꽤 좋은 세계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욕실 밖에서 털털털 돌아가며 내 옷을 깨끗하게 해주는 저 요상한 기계도 포함해서.
피로가 한꺼번에 싹 몰려왔다. 욕조 밖에 느껴지는 욕실의 공기는, 바깥보다는 낫지만 역시 춥다. 최대한 모든 몸을 욕조 안에 들였다. 편안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을만큼. 하지만 나는 멈춰있을수는 없다. 한시라도 멈추면- 그 녀석을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
풀려있던 몸에 긴장감을 실으며 나는 찬 공기를 물묻은 피부로 한껏 느끼며, 샴푸의 머리를 꾹 눌러 짜냈다. 눈을 찌르는 샴푸의 따끔함이 더욱 야속했다.
---
물에 너무 오래 잠겨있던 탓일까. 샴푸를 덜 씻어낸 탓일까. 영 개운하지 않았다. 기분전환으로 기분으로 꺼낸 베이컨도 영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날뛰어댄 후에 배가 안고플수 없었으므로, 억지로라도 먹기로 했다. 한 번, 꿀꺽. 두 번, 꿀꺽. 이렇게 삼킬 때마다 베이컨의 맛은 다르게 느껴졌다. 그 이유도 모르고 애초에 고려하지도 않고, 나는 그렇게 거북한 식사를 끝냈다. 남은 식기들을 정리하는 것도 귀찮게만 느껴졌다. 그런면에서 레이무와 나는 아무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다르다.
그녀는 강했다.
강하고 우아했다. 그리고... 천재적이었다. 그녀가 날리는 탄막. 그 탄막이 모여 이루는 도형의 군집. 모든 방면에서 완벽했다.
내가 그녀의 방식을 참고하지 않은 것도, 녀석에 대한 경쟁심리 뿐 아니라 그것을 완벽하게 따라할...
아니 아니 아니. 그, 음, 어쨌든. 그런 이유였다.
마을의 사람들은 뭐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지만, 요괴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알고 있다. 나보다는 역시 레이무가 강하다는 것을. 여태껏 이변을 나보다 운좋게 조금 빠르게 해결했던 것도 죄다 그 아이였으니까.
나야 마법사도 아닌 그냥 지극히 평범한 ‘인간’ 마법사이고, 레이무는 유카리 말로는 역대 하쿠레이의 무녀 중에서도 가장 강한 무녀니까.
그래, 냉정하게 생각해서 하쿠레이의 무녀인 그 녀석이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인 내가 더 약한 것은 당연하다.
그럼 내 부모님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러자고 집에서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나도 그 이후 단 한번도 아빠나 엄마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랬기 때문에 더 생각이 나고 어떨땐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들어가서야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야기는 똑같았다. 입 안에 남은 베이컨의 기름기가 더욱 느끼하게 느껴졌다.
---
퍼엉!
콜록콜록.
역시 이 버섯은 어떤 조합을 해도 영 꽝인 모양이다. 환기, 환기.
“후아~”
황혼 무렵의 시간은 어느덧 한밤중이 되어있었다. 마침 시원한 밤공기가 맡고 싶다 생각이 든 참이기도 했고.
스으으으읍-
퀴퀴한 방 냄새와 다르게 시원한 밤공기를 만끽한다. 밤하늘에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별이 오밀조밀하게 박혀있었다. 오늘 실험은 여기까지만 할까. 기록은. 음. 역시 귀찮다. 어차피 죄다 꽝이었으니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정리하자.
코우린에게서 빌려온 유리잔과 위스키 한 병을 꺼내왔다. 창가의 달을 안주삼기로 하고 잔을 따른 뒤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가을이 지나는 밤하늘은 차갑지만 별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완전히 악취미인, 쓰고 역한 알코올을 목 너머로 억지로 넘긴다. 혼자 마셔서 그런지 독한 녀석이라 그런지, 한 잔만으로도 머리에 타악 하고 취기가 느껴졌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엔 아까와 같이 별이 잔뜩이었다.
하늘에 가득한 별.
나도 빛나고 싶다.
내가 바라던.
내가 좋아하는.
하늘의 저 별처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온다.
또 그 뒤에는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다시 이 가을은 찾아오겠지.
그때까지 나는 이 유리잔에 저 별빛들을 한가득 담을 수 있을만큼 키가 클 수 있을까.
여전히 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구태여 입에 담고싶진 않다.
한 잔을 더 따르고 레밀리아가 하던 것처럼 꽤 운치있게 잔을 쥐어보았다. 이미 병의 술은 거의 없어져있었다. 심사가 더욱 뒤틀려서인가, 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가을이 겨울이 되고, 그게 몇 번이 반복되도, 나는 이 자리에서, 분하지만 이 곳에 언제나 머물러있지는 않을까.
정말로, 정말로 빌어먹게 짜증나는 밤이다.
(IP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