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센의 잠깐의 지체도 없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을 지었다.
여전히 사태를 파악할 수 없었던 아나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에이린과 레이센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뭐라 말을 하려던 아나타는 에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에이린의 시선은 아까보단 덜 싸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싸늘함이 덜해진 것 만큼 눈빛은 불길해졌다. 에이린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더 해보렴."
아나타는 무수히 많은 말이 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말도 지금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물론 여기서 더 말해서 레이센의 기합이 얼마나 더 심해지는지 그것도 궁금하긴 했지만…… 다음엔 자기 차례일지도 모른다. 레이센이 눈빛으로 입을 다물라고 한 것도 있으니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레이센은 머리를 박고, 아나타가 입을 다문 상태로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아나타의 머릿 속엔 더이상 다리가 저린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레이센이 다소 많이 힘들어보였다.
그리고 둘을 지켜보고만 있던 에이린이 입을 열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구나. 그럼 어떻게 된 일인 지 말해보거렴."
* * *
"……그래서 아나타는 레이센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고, 그 결과 실수로 탁자를 넘어뜨렸다는 거지?"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
아나타는 에이린의 요약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이린은 여전히 머리를 박고 있는 레이센을 돌아보았다.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레이센은 이를 악문 채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몸에서 흐른 땀은 그녀의 옷을 흠뻑 적셨으며, 이마에서 흐른 땀은 바닥에 고여 웅덩이를 이루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게 꽤 위험해보이는 상태였다. 하지만 에이린은 한 치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센, 아나타를 부려먹은 거 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어. 하지만…… 너보고 청소를 안해도 된다고 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거니?"
"아닙니다!"
레이센은 악을 쓰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아나타 혼자 청소를 하고 있던 거니?"
"그건……."
에이린의 질문에 레이센은 말을 흐렸다. 대답이 늦어질 수록 고통의 시간은 늘어만 가지만, 멍청한 대답을 한다면 고통의 강도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스승님이 아나타에게 일을 시키라고 했으니까 밑바닥 인생을 탈출한 줄 알아서? 그게 사실이고 올바른 대답이지만 동시에 멍청한 대답의 예시였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까? 스승님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 또한 멍청한 대답의 또다른 예시였다. 결과적으로 레이센 자신이 멍청했다.
레이센이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에이린이 눈을 가늘게 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야. 거기다가 네가 아나타를 부려먹은 이상 아나타가 잘못한 건 네가 책임을 져야겠지?"
"네!"
"그 상태로 계속 있어."
에이린은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아나타, 너도 힘들면 힘들다고 해. 어디까지나 재활운동이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어."
상냥한 말투였지만 거기에 숨어있는 위협감은 아나타로 하여금 실없이 웃게 만들었다. 말하라고 해서 말했다간 레이센꼴 날 거 같지 말입니다, 에이린? 그 생각은 당연히 말로 꺼낼 수는 없었다. 대신 아나타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러도록 하죠. 그런데 부려먹은 건 뭐라고 안한다니요…… 그건 무슨 뜻이에요?"
"일하지도 않은 자는 먹지도 말아야지."
"재활운동이라면서요?"
"재활운동 겸 일을 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잡일을……."
"그런 거 일일이 신경쓰면 지는 거란다."
"지는 게 이기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영원히 지고 사렴."
"고려해볼게요."
아나타가 끊임없이 꼬투리를 잡아대는 덕분에 무의미한 논쟁이 오고갔다. 에이린은 왠지 두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나타는 아무 생각 없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또 어떤 머리 아픈 소리를 할까 짜증이 난 에이린은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을 선택하기로 했다. 에이린은 귀찮다는 듯이 말하며 아나타의 말을 끊었다.
"레이센─"
"자, 잠시만요! 이제 됬다는 말을 하려고 했어요!"
아나타는 급히 에이린의 말을 막았다. 레이센이 머리를 박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센이 잘못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까부터 설마하긴 했지만 자신의 잘못까지도 레이센이 덤터기 쓰고 있는 게 확실했다. 에이린은 레이센을 한 번 흘겨보고는 아나타에게 말했다.
"그러니?"
"예."
"다행이구나. 어쨌든 앞으로는 조심해줘. 내가 부주의하게 납둔 것 중에는 위험한 것도 있고 중요한 것도 있으니까."
아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자, 그럼 아나타는 나가봐. 아, 어지럽혀 놓은 것 좀 치워놓고."
에이린의 말을 끝나자 아나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에이린에게 목례했다. 그리고 슬쩍 레이센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머리를 박고 있던 레이센은 아나타가 자신을 향해 의미분명한 미소를 짓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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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병장님의 수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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