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센 우동게인 이나바는 달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지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활의 대부분을 야고코로 에이린에게 보장받고 있었고 그건 레이센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레이센에게 에이린은 필요한 존재란 소리다. 하지만 에이린에게 레이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래서 레이센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자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보통은 하기 귀칞은 잡일을 하면서.
그래서 레이센에게 가장 듣기 두려운 말이 생겼다. 필요없다. 쓸모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렵지 않다. 자신이 쓸모 없어지면 자신은 버려지고 그 이후로는 암담해서, 너무 암담해서 보이지가 않는다.
아나타의 방을 나온 레이센은 아나타를 걱정하는 한편 자신에게 매우 만족했다. 에이린에게 자신의 능력을, 즉 필요성을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센은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에이린을 찾아갔다. 어쩌면 이제 더이상 잡일을 안해도 될지도 모른다!
레이센은 에이린을 찾아갔고 아나타와의 대화를 말해줬다.
그리고 에이린은 레이센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정말 쓸모없는 토끼네."
"그렇…… 네? 뭐라고요?"
레이센은 덜도 말고 버림 받은 토끼의 표정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겁에 질리고, 걱정에 사로잡히고, 또 의문에 짓눌린 달토끼는 제발 자신이 잘못 들었길 빌었다. 에이린의 두 눈동자를 보면 '이 쓸모없는 토끼를 어떻게 해부할까?'라고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졸지에 장기 자랑을 하게 된 달토끼는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알 수 없었다. 에이린은 레이센의 표정만 보고도 그걸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이센?"
"네!"
"내가 너한테 무엇을 부탁했지?"
"그건……."
기합이 잔뜩 들어간 레이센은 죽을 힘을 다해 머리를 쥐어싸맸다. 에이린이 부탁한 것은…….
"스승님께선…… 그러니까 아나타를 감시하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예!"
"난 '감시'하라고 했지?"
"예!"
"쓸데없는 걸 물어보라는 소리는 안했지?"
"……예."
레이센은 그제서야 에이린이 왜 화가난 것인지 약간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린이 저렇게까지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겨우 그거 물어본 것만으로?
에이린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
"하아……. 레이센, 다시 말해줄게.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어주길 바라. 아나타를 감시해줘."
"예……."
레이센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감이 사라진 레이센의 어깨는 축 쳐졌다.
"어쨌든 아나타가 5초 정도 혼절했었다고? 다른 데 이상은 없고?"
"붕대가 땀으로 모두 다 젖었던데요. 5초 만에."
"그래? 우선 가봐야겠구나. 레이센, 너는 우선……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갔다올게."
* * *
아나타는 오른손잡이였지만 다행히─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하듯─ 왼손을 사용할 줄 알았다. 왼손으로 식사하는 건 극히 어색했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아나타는 그걸 깨닫고 어색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몇 숟가락 푸지도 못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야고코로 에이린이었다.
야고코로 에이린은 약사였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유능한 의사였고, 광대한 지신을 가진 과학자였으며, 사실 마법사라는 직업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의 의술은 거의 마법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죽기 일보 직전인 아나타를 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런 에이린도 아나타가 스스로 치유를 늦추는 행동엔 트집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붕대를 풀면 곤란한데? 완치되기까지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어정쩡하게 회복될 수도 있어."
"에이, 겨우 붕대를 푸는 것 정도로요? 거기다 그래봐야 팔 하나 없어진 것보다 더 하겠어요?"
식사하기 직전 땀에 젖은 붕대를 헤쳐놓은 아나타는 에이린의 꾸중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린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여전히 기억나는 건 없어?"
"그런 셈이죠."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아나타는 대답하고 나서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응? 레이센에게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나요?"
"이야기라니? 무슨 소리야?"
"……."
아나타는 잠시 한 2초 정도 생각했다.
"아니요. 그냥…… 제가 사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 같은 거요."
"아아, 그거?"
에이린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레이센도 그렇고 에이린도 그렇고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나타는 그 점이 궁금했다. 어지간한 것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나타라도 에이린과 레이센의 태도는 매우 신경쓰였다.
"레이센만해도 달에서 사는 토끼였는데 대수로울 게 있겠니? 달의 도시도 다른 세계라면 다른 세꼐 이나니?"
"아…… 그러네요."
아나타는 그제서야 레이센이 달에서 사는 토끼고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게 특이하다는 걸 깨달았다. 에이린도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여긴 어디죠?"
"환상향. 어느 요괴가 만든 잊혀진 자들, 환상이 되어버린 자들의 도피소야."
"잊혀진 자들?"
그렇다면 나도 잊혀진 사람이란 소리인가? 아나타는 문뜩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긴 했다. 자신에게 잊혀진 자신. 에이린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아나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사실 그건 너무 거창한 설명이고 그냥 누구든지 지낼 만한 작은 세계야."
"환영식으로 멀쩡한 사람 하나 반쯤 죽여놓는 세계고요. 진짜 누구든지 지낼 만한 거 맞아요?"
아나타는 비꼬듯이 말했다. 그러나 악감정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에이린은 나름대로 친절히 답해주었다.
"차차 알게 될거야. 그리고 아마 너는 우리가 바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왔겠지. 하여튼 간에 완치되면 당장 내쫓을 거니까 마음의 준비는 해둬. 식객은 하나로 족해서 말이야."
에이린에게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아나타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것 참 아쉽네요."
에이린은 아나타의 말을 무시하며 아나타의 말을 물었다.
"그러고보니 다른 데 아픈 곳은 없고?"
"마음이 아파요. 내쫓을 거라니요."
"치료해줄까?"
"……메스로요?"
에이린은 방긋 웃을 뿐 그 이상의 대답이 될만한 말이나 행동은 들려주거나 보여주지 않았다. 아나타는 그 잔인하게 보이는 웃음이 긍정이라는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나타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눈이 좀 침침한 거 같아요."
"침침하다고?"
에이린은 그렇게 반문하며 아나타의 두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얼굴을 가까이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당장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에 불순한 생각이 겹쳐 아나타는 당장이라도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다행히 불순한 생각이 극에 달해 얼굴이 달아오르기 직전 에이린이 고개를 당겼다.
"눈동자 색이 좀 칙칙하네."
아나타의 눈은 갈색과 검은색을 뒤섞은 듯한 아나타의 눈동자 위에 마치 스모그가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에이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 침침한 정도가 아니지? 어지간해선 보기도 힘들텐데."
아나타는 놀란 눈으로 에이린을 바라보았다. 에이린의 말마따나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예외로 하자. 아무리 초점이 하나도 안 맞지 않아 아나타가 바라보는 세상이 둘로 나눠보이고, 흐릿한 걸 뛰어넘어 바라보는 대상이 주위에 녹아들 듯 보이고, 색깔의 윤곽이 모두 사라져 색이 하나도 구별되지 않더라도, 아나타는 에이린을 보려고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결과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주 안 좋아. 지금도 심각할테지만 결국엔 장님이 되어버릴 수 있어."
"……치료 가능한 건가요? 아니, 그전에 무슨 병이죠? 백내장?"
에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치료는 힘들 거 같아. 안구를 갈아끼운 다해도 나이지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건 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너 자신에게 문제가 있거든. 너의 눈을 잠식한 병이 아니야. 너 자신에게 걸린 저주야."
아나타는 불만이라도 내뱉듯이 말했다.
"기억도 나지 않으니 왜 저주를 받았는 지 알 방법도 없네요.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저는 매우 불만이군요. 망할 놈의 기억을 잃기 전의 나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나저나 저주라면 그거 맞나요? 누군가를 원망해서 밀집인형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표 붙이고 못 박는 그거?"
"그런 거창한 저주는 아니야. 이건 요괴의 장난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지. 근데 병이라면 내가 고쳐줄 수 있지만 아쉽게도 병이 아니면…… 유감이지만 눈은 포기하는 게 좋아."
장님을 선고 받은 아나타는 기분이 착잡했고 그걸 숨길 필요를 못 느껴 그걸 내색했다.
"……미래의 일은 미래에 생각하도록 합시다."
에이린은 팔짱을 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될 껄?"
"걱정해줘서 고맙네요. 아니, 고마워요."
"걱정은 안해. 충고야."
에이린은 단호히 말했다. 에이린의 말과 상관없이 아나타는 다소 찜찜했다. 살아난 건만 해도 기적인거니 시력 정도는 포기해도 되는 건가? 아나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었고 내리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저 언제까지고, 혹은 눈이 멀어버릴 때까지 답을 보류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찜찜한 건 단호히 말한 에이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나타와 이유는 달랐다. 에이린은 아나타의 눈을 저 꼴로 만든 요괴를, 그리고 저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계의 저주'. 에이린이 그 저주에 붙힌 이름이다. 그리고 이 저주를 걸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환상향을 만든 틈새의 요괴, 야쿠모 유카리. 그녀밖에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 요괴가 관계됬다는 것은 지독히 찜찜한 일이었다.
에이린은 고민 끝에 흘려보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전혀 답이 없는 건 아니야."
"아, 좋은 소식이네요."
"말했지? 이건 저주라고. 그렇다면 그 저주를 극복할 만큼 힘을 기르면 돼."
보통은 불가능할테지만. 에이린은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나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게 쉬웠다면 진작에 말해줬을테지.
"말하는 만큼 쉬우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힘을 기르려면 뭘 해야되죠? 운동? 팔굽혀펴기? 아니면 공부?"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 당장해야될 건 아무래도 재활 운동이겠지? 환자 군?"
아나타는 잠시 생각해보니 그게 옳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타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동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에이린의 표정을 본 아나타는 자신이 무언가 착각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속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에이린의 표정은 마치 막 잡일을 해줄 하인을 불법계약으로 얻은 악덕고용주의 표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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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에서 써놓은 거 다 쓰고 갈까
현재 주인공 장애증상
(흔한) 기억상실, (메이드 바이 앨리스의 오토메일을 기약한) 오른팔 없음, 눈 리신
그래서 레이센에게 가장 듣기 두려운 말이 생겼다. 필요없다. 쓸모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렵지 않다. 자신이 쓸모 없어지면 자신은 버려지고 그 이후로는 암담해서, 너무 암담해서 보이지가 않는다.
아나타의 방을 나온 레이센은 아나타를 걱정하는 한편 자신에게 매우 만족했다. 에이린에게 자신의 능력을, 즉 필요성을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센은 잔뜩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에이린을 찾아갔다. 어쩌면 이제 더이상 잡일을 안해도 될지도 모른다!
레이센은 에이린을 찾아갔고 아나타와의 대화를 말해줬다.
그리고 에이린은 레이센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정말 쓸모없는 토끼네."
"그렇…… 네? 뭐라고요?"
레이센은 덜도 말고 버림 받은 토끼의 표정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겁에 질리고, 걱정에 사로잡히고, 또 의문에 짓눌린 달토끼는 제발 자신이 잘못 들었길 빌었다. 에이린의 두 눈동자를 보면 '이 쓸모없는 토끼를 어떻게 해부할까?'라고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졸지에 장기 자랑을 하게 된 달토끼는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알 수 없었다. 에이린은 레이센의 표정만 보고도 그걸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이센?"
"네!"
"내가 너한테 무엇을 부탁했지?"
"그건……."
기합이 잔뜩 들어간 레이센은 죽을 힘을 다해 머리를 쥐어싸맸다. 에이린이 부탁한 것은…….
"스승님께선…… 그러니까 아나타를 감시하라고 하셨어요……."
"그렇지?"
"예!"
"난 '감시'하라고 했지?"
"예!"
"쓸데없는 걸 물어보라는 소리는 안했지?"
"……예."
레이센은 그제서야 에이린이 왜 화가난 것인지 약간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린이 저렇게까지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겨우 그거 물어본 것만으로?
에이린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
"하아……. 레이센, 다시 말해줄게.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어주길 바라. 아나타를 감시해줘."
"예……."
레이센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감이 사라진 레이센의 어깨는 축 쳐졌다.
"어쨌든 아나타가 5초 정도 혼절했었다고? 다른 데 이상은 없고?"
"붕대가 땀으로 모두 다 젖었던데요. 5초 만에."
"그래? 우선 가봐야겠구나. 레이센, 너는 우선……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갔다올게."
* * *
아나타는 오른손잡이였지만 다행히─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하듯─ 왼손을 사용할 줄 알았다. 왼손으로 식사하는 건 극히 어색했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아나타는 그걸 깨닫고 어색하게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몇 숟가락 푸지도 못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야고코로 에이린이었다.
야고코로 에이린은 약사였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유능한 의사였고, 광대한 지신을 가진 과학자였으며, 사실 마법사라는 직업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의 의술은 거의 마법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죽기 일보 직전인 아나타를 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런 에이린도 아나타가 스스로 치유를 늦추는 행동엔 트집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계속 붕대를 풀면 곤란한데? 완치되기까지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어정쩡하게 회복될 수도 있어."
"에이, 겨우 붕대를 푸는 것 정도로요? 거기다 그래봐야 팔 하나 없어진 것보다 더 하겠어요?"
식사하기 직전 땀에 젖은 붕대를 헤쳐놓은 아나타는 에이린의 꾸중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린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여전히 기억나는 건 없어?"
"그런 셈이죠."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아나타는 대답하고 나서야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응? 레이센에게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나요?"
"이야기라니? 무슨 소리야?"
"……."
아나타는 잠시 한 2초 정도 생각했다.
"아니요. 그냥…… 제가 사실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 같은 거요."
"아아, 그거?"
에이린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레이센도 그렇고 에이린도 그렇고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나타는 그 점이 궁금했다. 어지간한 것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나타라도 에이린과 레이센의 태도는 매우 신경쓰였다.
"레이센만해도 달에서 사는 토끼였는데 대수로울 게 있겠니? 달의 도시도 다른 세계라면 다른 세꼐 이나니?"
"아…… 그러네요."
아나타는 그제서야 레이센이 달에서 사는 토끼고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게 특이하다는 걸 깨달았다. 에이린도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여긴 어디죠?"
"환상향. 어느 요괴가 만든 잊혀진 자들, 환상이 되어버린 자들의 도피소야."
"잊혀진 자들?"
그렇다면 나도 잊혀진 사람이란 소리인가? 아나타는 문뜩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긴 했다. 자신에게 잊혀진 자신. 에이린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아나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사실 그건 너무 거창한 설명이고 그냥 누구든지 지낼 만한 작은 세계야."
"환영식으로 멀쩡한 사람 하나 반쯤 죽여놓는 세계고요. 진짜 누구든지 지낼 만한 거 맞아요?"
아나타는 비꼬듯이 말했다. 그러나 악감정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에이린은 나름대로 친절히 답해주었다.
"차차 알게 될거야. 그리고 아마 너는 우리가 바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왔겠지. 하여튼 간에 완치되면 당장 내쫓을 거니까 마음의 준비는 해둬. 식객은 하나로 족해서 말이야."
에이린에게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아나타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것 참 아쉽네요."
에이린은 아나타의 말을 무시하며 아나타의 말을 물었다.
"그러고보니 다른 데 아픈 곳은 없고?"
"마음이 아파요. 내쫓을 거라니요."
"치료해줄까?"
"……메스로요?"
에이린은 방긋 웃을 뿐 그 이상의 대답이 될만한 말이나 행동은 들려주거나 보여주지 않았다. 아나타는 그 잔인하게 보이는 웃음이 긍정이라는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나타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눈이 좀 침침한 거 같아요."
"침침하다고?"
에이린은 그렇게 반문하며 아나타의 두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얼굴을 가까이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당장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에 불순한 생각이 겹쳐 아나타는 당장이라도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다행히 불순한 생각이 극에 달해 얼굴이 달아오르기 직전 에이린이 고개를 당겼다.
"눈동자 색이 좀 칙칙하네."
아나타의 눈은 갈색과 검은색을 뒤섞은 듯한 아나타의 눈동자 위에 마치 스모그가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에이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는 게 어때? 침침한 정도가 아니지? 어지간해선 보기도 힘들텐데."
아나타는 놀란 눈으로 에이린을 바라보았다. 에이린의 말마따나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예외로 하자. 아무리 초점이 하나도 안 맞지 않아 아나타가 바라보는 세상이 둘로 나눠보이고, 흐릿한 걸 뛰어넘어 바라보는 대상이 주위에 녹아들 듯 보이고, 색깔의 윤곽이 모두 사라져 색이 하나도 구별되지 않더라도, 아나타는 에이린을 보려고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결과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주 안 좋아. 지금도 심각할테지만 결국엔 장님이 되어버릴 수 있어."
"……치료 가능한 건가요? 아니, 그전에 무슨 병이죠? 백내장?"
에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치료는 힘들 거 같아. 안구를 갈아끼운 다해도 나이지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건 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너 자신에게 문제가 있거든. 너의 눈을 잠식한 병이 아니야. 너 자신에게 걸린 저주야."
아나타는 불만이라도 내뱉듯이 말했다.
"기억도 나지 않으니 왜 저주를 받았는 지 알 방법도 없네요.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저는 매우 불만이군요. 망할 놈의 기억을 잃기 전의 나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나저나 저주라면 그거 맞나요? 누군가를 원망해서 밀집인형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표 붙이고 못 박는 그거?"
"그런 거창한 저주는 아니야. 이건 요괴의 장난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지. 근데 병이라면 내가 고쳐줄 수 있지만 아쉽게도 병이 아니면…… 유감이지만 눈은 포기하는 게 좋아."
장님을 선고 받은 아나타는 기분이 착잡했고 그걸 숨길 필요를 못 느껴 그걸 내색했다.
"……미래의 일은 미래에 생각하도록 합시다."
에이린은 팔짱을 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될 껄?"
"걱정해줘서 고맙네요. 아니, 고마워요."
"걱정은 안해. 충고야."
에이린은 단호히 말했다. 에이린의 말과 상관없이 아나타는 다소 찜찜했다. 살아난 건만 해도 기적인거니 시력 정도는 포기해도 되는 건가? 아나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었고 내리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저 언제까지고, 혹은 눈이 멀어버릴 때까지 답을 보류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찜찜한 건 단호히 말한 에이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나타와 이유는 달랐다. 에이린은 아나타의 눈을 저 꼴로 만든 요괴를, 그리고 저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계의 저주'. 에이린이 그 저주에 붙힌 이름이다. 그리고 이 저주를 걸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환상향을 만든 틈새의 요괴, 야쿠모 유카리. 그녀밖에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 요괴가 관계됬다는 것은 지독히 찜찜한 일이었다.
에이린은 고민 끝에 흘려보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전혀 답이 없는 건 아니야."
"아, 좋은 소식이네요."
"말했지? 이건 저주라고. 그렇다면 그 저주를 극복할 만큼 힘을 기르면 돼."
보통은 불가능할테지만. 에이린은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나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게 쉬웠다면 진작에 말해줬을테지.
"말하는 만큼 쉬우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힘을 기르려면 뭘 해야되죠? 운동? 팔굽혀펴기? 아니면 공부?"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 당장해야될 건 아무래도 재활 운동이겠지? 환자 군?"
아나타는 잠시 생각해보니 그게 옳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타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동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에이린의 표정을 본 아나타는 자신이 무언가 착각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속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에이린의 표정은 마치 막 잡일을 해줄 하인을 불법계약으로 얻은 악덕고용주의 표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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