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역할 이론의 변화와 역할 파괴
(1) 얼버무림(誤魔化し)
앞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물리 막이 포케몬은 존재할 수 없다' 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기를 하다 보면 한 포케몬에게 여러 물리 어태커들이 줄줄히 막히는 경우가 왕왕 생기곤 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파티의 타입 상성에 문제가 있었을 확률이 높지만, 이 얼버무림에 의해서일수도 있습니다.
얼버무림이란 각종 상태이상, 벽 설치, 기후변화(쾌청, 비바라기, 모래바람) 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막이를 성립시키고 있는 상황을 뜻합니다. 이 경우, 회복기의 유무는 따지지 않는 것으로 합니다.
예를 들어 리플렉터가 깔린 상태에서 워시로토무는 '일시적으로' 화상상태인 메가캥카의 공격을
두세방 정도는 견딜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예로는 수치상 14~19만에 달하는 특수내구력을 자랑하는 돌격조끼 마기라스가 있습니다.
마기라스가 어느 정도 경쟁력 있는 특수막이로 활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돌격조끼를 착용할 것, 그리고 필드에 모래바람이 불고 있을 것.
이 두 가지 상황이 충족되면 마기라스는 4배 고위력기인 기합구슬도 비자속이라면 노란피 언저리에서
받아낼 수 있을 정도의 막이 능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됩니다.
최근 파워 인플레가 극대화되는 추세에 따라 일반적으로 '막이'라고 하면 이쪽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역할 파괴
번치코와 한카리아스의 예에서, 잠재파워-얼음을 통해 번치코는 한카리아스를 '일시적으로' 완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라는 단서가 붙은 것은, 역할 파괴라는 정의 자체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번치코가 '잠재파워-얼음'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허를 찌르는 것이 가능했지만,
만약 '번치코가 '잠재파워-얼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고 상대가 경계하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그것이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방어도 없고 기띠도 없는 '역할파괴' 번치코는 한카리아스의 선공 지진에 허무하게 제압되겠지요.
대중적인 역할 파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2세대의 쥬피썬더가 아닐까 싶습니다.
단일 전기타입인 쥬피썬더는 자력 또는 교배기로 땅타입을 찌를 수 있는 기술을 배우지 않습니다.
땅타입은 전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쥬피썬더는 땅타입의 절호의 먹이입니다.
그런데, 교체턴+선공권을 이용해 2발의 '잠재파워-얼음'을 맞춘다면 상대 포케몬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거나,
잡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무렵에는 한카리아스, 보만다 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재-풀 또한 잠재-얼음만큼이나 대중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 대타출동까지 깔게 되면 더더욱 확실히 땅 타입을 잡아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2세대 후반에는 이러한 배치가 거의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쥬피썬더를 보면 '잠재파워-얼음' 부터 생각나지 않습니까?
쥬피썬더의 경우 워낙 기술폭이 좁아서 여전히 잠재파워-얼음이 채용되고 있습니다만, 왠만큼 기술폭이 주어진 녀석들은
한시적으로 역할 파괴 형태를 채용되다가도 유행이 지나면 다시 정석 배치로 돌아오곤 합니다.
왜냐하면 역할 파괴 형태는 어쨌든 특수한 몇몇 상황을 제외한다면 정석 형태보다 효율면에서 떨어지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장난 같은 이야기이지만, 만약 역할 파괴형 기술이 정석 형태보다 더 효율이 좋다면,
애초에 그 기술이 정석 형태로 자리잡았을 것입니다).
글라이온이 한창 판치던 시절, 테라키온이 잠재파워-얼음을 들고 다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3) 일격필살
일격필살은 최고의 역할 파괴 기술입니다.
일격기가 들어가면 옹골참, 기합의띠 외의 모든 포케몬은 평등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운포케 등 혹평을 받을 때도 있지만 이러한 기술이 존재하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단순히 일격기만을 의미하던 일격필살은, 상대의 전략 하나를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드는 기술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때 유행한(지금도 종종 보입니다만) 흉악한 수면기인 다크홀에 대처하는 방법 중
재미있는 것 하나로 스카프+신비의부적 전법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더더욱 신비의부적을 무력화하는 안개제거를 기용하기에 이릅니다.
즉, 다크홀(역할파괴)→신비의부적(역할)→안개제거(역할파괴') 이런 흐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만약 안개제거를 무력화하고 싶다면 속이다 또는 짖맘 도발 등이 해법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조금 더 친숙한 예로는, 더블배틀에서 쓰이는 페인트 카포에라가 있겠습니다.
집중 공격→방어(역할 파괴)→페인트(역할 파괴를 파괴).
서포터 포케몬에 대한 사형선고와도 같은 전략으로는 구애아이템을 '트릭'으로 넘겨주거나,
짖궂은마음 특성을 통한 선제 '도발', 또는 기술 '앵콜'을 사용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또는 잘 사용되지는 않지만, 기술 '봉인'을 이용해 상대의 '방어' 등 채용률이 높은 기술을
막아버리는 것 또한 이 분류에 속하겠지요.
(4) 간접 역할 파괴
서로 역할을 부여받지 않은 포케몬들 끼리의 전투를 통해, 현재 전투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멤버들에게 걸린 역할을 무력화하는 것을 간접 역할 파괴라고 합니다.
이전 글에서 들었던 윈디와 루카리오의 예에서,
플레이어 1 입장에서는 윈디에게 나인테일을 돌파해야 한다는 역할이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만,
역으로 말하면 플레이어 2의 나인테일은 윈디에게 돌파당해서는 안 된다는 역할이 걸려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핫삼의 불릿펀치를 맞고 버틸 정도의 HP를 남겨야 한다는 역할)
루카리오가 자신의 몸을 던져 멋지게 윈디에 대한 간접 역할 파괴를 수행한 결과,
나인테일에게 걸려 있던 역할이 해소됨으로써 경기를 승리로 가져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회복수단이 없는 일반적인 포케몬들이 후 내밀기 교체를 통해 약간씩 데미지를 축적하게 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후 내밀기 교체를 할 수 없는 상황(남은 HP가 너무 적어, 죽어 내밀기가 됨)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첫 번째 글에서의 아쿠스타의 예에서 9턴째에 아쿠스타가 후 내밀기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떠올려 주세요.
(5) 못박기(釘付け)
상대가 버섯모를 엔트리할 것으로 예상된다면 발빠르고 버섯모에 타점을 가지는 녀석들 위주로 편성할 것.
아무리 강력한 버섯모라도 상대가 영수폼 볼트로스 같은 녀석들만 있다면
후 내밀기는 물론 대면조차 껄끄럽게 됩니다.
내구력과 결정력이 모두 우수하지만 스피드가 느린 포케몬들이 있는 반면,
내구력과 결정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스피드가 빠른 포케몬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역할이론에 의하면 데미지 레이스를 펼칠 때 전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되는데,
이처럼 변칙적인 엔트리를 통해 선공의 이점을 살리도록 합시다.
선공기 역시 못박기 전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6) 기점
자신이 기점을 잡을 수도 있지만 상대에게 기점을 잡힐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지진을 쓸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팬텀을 후 내밀기 한다면 부유 특성을 통해 기점을 잡는 것이 됩니다.
자신이 용성군을 사용했는데 상대가 마릴을 꺼내든다면 타입 상성을 통해 기점을 잡히는 것이 됩니다.
그 밖에는 씨뿌리기, 스텔스록 등의 데미지 축적, 카운터 기술, 상태이상 등을 통해 빈틈을 만드는 것 역시
기점을 만든다고 표현합니다.
6세대 들어 주목받는 메가진화 포케몬들 중에는 이러한 기점 잡기에 능한 녀석들이 많습니다.
1) 메가리자몽X, 메가갸라도스 : 진화 전-후의 타입상성 변화를 통한 기점 잡기.
진화 전에 비행타입을 통해 지진 등에 후 내밀기가 가능하지만 메가진화하는 순간 전기, 바위 등에 내성이 생깁니다.
메가리자몽X의 경우 전기자석파를 채용하지 않은 워시로토무에게조차 기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스위퍼임에도 종종 선봉에 튀어나오는 일도 있습니다.
2) 메가이상해꽃 : 수면가루, 씨뿌리기를 이용한 기점 만들기.
3) 메가팬텀 : 특성 부유-그림자밟기를 통해 상대의 교체플레이 봉쇄.
일방적으로 기점을 잡히게 되면 상대는 즉시 랭크업 등을 통해 스윕을 노려올 것이기 때문에
기점은 실전 배틀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역할 파괴의 가치
역할 파괴에 대해 주구장창 써 놓았다고 필자가 역할 파괴 페티시가 아니냐고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역할 파괴는 실전 배틀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할 파괴가 없었다면 모든 배틀의 결과는 종족값과 기술 위력의 합계순으로 결정되겠지요.
대단히 강력한 ○○를 역할 파괴를 통해 정지시킬 수 있는 ★★라는 마이너 포케몬을 발굴해내는 것.
이것이 메타게임 변화의 시작입니다.
예를 들어 누오.
종족값도 중하, 배우는 기술도 평범. 상위호환인 것처럼 보이는 대짱이 등이 존재.
심지어 친구인 줄 알았던 메깅은 땅가르기도 배우고 교배로 용의 춤 등으로 어떻게든 써먹을 방도가 있는 상황.
도대체가 파티에 채용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이 녀석의 가치는, DW특성 '천진'에 있습니다.
스위퍼 역할을 담당하는 물리 어태커들은 대부분 랭크업 기술을 토대로 결정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메가 리자몽 X, 한카리아스, 메가 캥카, 메가 갸라도스, .....
제때 반응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파티가 쓸려나가는 무서운 녀석들이죠.
하지만 이놈들이 유독 누오 앞에만 서면 작아집니다.
천진 : 상대의 능력 변화를 무시한다.
더군다나 누오는 교배를 통해 '저주(둔함)'를 습득 가능합니다.
이쪽의 공방 랭크업은 그대로 적용되면서 상대의 공격 랭크업은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적절한 특수 어태커가 없다면 오히려 2번 이상 둔함을 쌓은 누오에게 역으로 스윕당할 수 있습니다.
포켓무버 개시에 따라 냉동펀치 누오가 풀리게 되었는데,
폭오/지진 라인업이 다소 밋밋하다고 느껴지셨던 분들은 냉동펀치를 채용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예를 들어 라프라스.
간판 포케몬(피카츄, 코뿌리, 라프라스) 중의 하나인 라프라스입니다만,
사실 성능면에서 매우 뛰어난 포케몬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전작에서도 어떤 타입에도 막히지 않는 우수한 일격기인 절대영도를 가지고 있으며,
특성 '저수'와 '10만볼트', '번개' 등의 기술을 채용해 물막이로 활약 가능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10만볼트'는 비자속이라 결정력이 부족했고, '번개'는 비팟이라도 만나지 않으면
제 구실을 하기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6세대 들어 신규 얼음타입 기술 '프리즈드라이'의 등장으로 다시금 활로를 찾았다고 하겠습니다.
자속성이며, 각종 4배타 속성이 매우 많은 관계로 여기저기 툭툭 찔러보기 참 좋은 기술입니다.
심지어 물리포케몬인 맘모꾸리가 매력적인 서브웨폰인 스톤에지를 버리고 채택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죠.
어느 정도 기본기를 갖추고,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다면 여러분만의 역할 파괴 포케몬을
구상해 보는 것도 분명 즐거운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9. 역할 이론이 갖는 한계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역할 이론은 사실상 그 수명을 다한 이론입니다.
역할 이론이 처음 소개된 금은(GBC)시절과 오늘날의 배틀 환경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 이 이론을 새로 배운다고 해서 갑자기 대전의 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론은 해피너스, 잠만보, 무장조 등 거의 완벽한 막이가 존재하였고, 잠자기-잠꼬대, 압정뿌리기-날려버리기,
치료의종소리, 검은눈빛-멸망의노래 등의 전략이 비교적 일반적으로 활용되었을 무렵에 생겨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3세대(GBA)에서 노력치 체계가 개편되었고, 4세대에서 기술의 물리/특수 적용이 개선됩니다.
내구력 보정에 한계가 생기고 고화력 기술들이 대거 추가되는 흐름 속에서 '막이' 포케몬들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5세대에서 진화의휘석이 추가되어 휘석 럭키, 폴리곤 2 등 나름대로 탄탄한 내구력을 가진 녀석들이
추가되기는 했습니다만, 그조차도 2세대 기준으로 생각하면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내구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막이' 등 역할 이론 내에서의 일부 역할이 갖는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이야기이지,
'파티 내의 특정 포케몬에게 역할을 부여한다',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포케몬을 파티에 채용한다'
라는 역할 이론의 근본적인 이념만큼은 배틀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던지 적용되는 부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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