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2개월여 전인 11월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검색을 하다가 트위터에서 누군가가 두리둥실 뭉게공항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표절이라고 말하는 내용의 트윗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작품의 이름이 남쪽 섬의 작은 비행기 버디(南の島の小さな飛行機 バーディー) 라는, NHK에서 2005년 말부터 2년 정도 방영되었던 작품이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공식홈페이지에 올라온 시놉시스를 봐서 아무래도 일리가 없는 말 같았습니다. 순간 2009년에 있었던, 슈퍼햄스밴드 케이온 표절의혹에 대한 아픈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3년 전부터 기획되고 준비된 작품이었지만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소재가 겹치는 '듯한' 작품이 나왔다는 이유로 표절이라고 까였던 그 일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슈퍼햄스밴드 오프닝. 본편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오프닝만 알려진 상태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표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급기야는 니코니코동화에까지 업로드되어 일본인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던 그 작품… 하지만 까고 보니 단지 '밴드부'라는 설정만 겹칠 뿐 본내용은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한국애니라면 덮어놓고 무조건 까기만 하는 세태가 부른 촌극입니다.
▲ '남쪽 섬의 작은 비행기 버디'와 '두리둥실 뭉게공항'
아무래도 혼자서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문제를 공론화시키기로 하고 여기를 포함해서 아는 게시판 두어 곳에 의견을 물었으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들 제대로 판단하기가 쉽겠습니까? 결국 영상을 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사실 여러 사람이 같이 보고 같이 평가를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두리둥실 뭉게공항 내용을 완전히 아는 사람이 제 자신밖에 없어서 (항상 불만인 부분입니다.) 결국은…
그래도 요새 엔화가 싸서 망정이지…
6권정도 발매된 모양인데 전부 다 사는 건 자금사정상 안되었고 한 권만 사기로 합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하셔야 할 점은, 저는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DVD 자체에 딱히 자막을 지원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영어자막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이런 작품의 자막을 만들 만한 분도 안 계신 것 같고…
결국 버스에서 라바 보는 기분으로 봤습니다.
각 애니 타이틀. 일단 제목이 너무 기니까 앞으로는 버디라고 쓰겠습니다.
두리둥실 뭉게공항도 길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길 줄이야…
1. 오프닝
(클릭재생)
오프닝만큼은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는데, 버디는 오프닝곡에 맥아리가 없어서… 듣고 있자니 힘이 빠지는데 그래도 계속 들으니까 흥얼거릴 만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오프닝곡은 뭉게공항이 더 낫습니다. 하지만 뭉게공항의 오프닝 영상은 한국애니의 고질병중 하나인 본편 짜깁기 오프닝… 버디는 따로 만든 오프닝…
2. 배경
버디는 제목 그대로 남쪽 열대 지방의 작은 섬에 있는 '버드 파라다이스 공항' 이 주무대입니다. 이름이 공항이긴 하지만 보시다시피 그냥 섬에 있는 작은 비행장입니다. 하지만 '뭉게공항'은 대도시를 끼고 있는 초대형 공항이죠. 인천공항 및 몇몇 실존하는 공항들을 모델로 해서 디자인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공항 건물이 인천공항의 그것을 닮았습니다.
희한하게도 주인공들의 이 모공항 크기의 차이가 작품 스케일 차이에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버디가 대체로 '버드 파라다이스 섬'과 그 인근에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뭉게공항은 열대, 사막, 극지, 산지… 심지어는 우주까지 그야말로 전 지구적인 스케일을 보여줍니다.
3. 캐릭터
▲ 왼쪽부터 필립, 버디, 애니
▲ 왼쪽부터 에밀리, 윙키
사실 두 작품을 놓고 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차이가 바로 캐릭터인데, 버디에서 나오는 비행기 또는 차량 캐릭터들은 탈것 동물 (새, 포유류, 곤충, 물고기…) 등등을 적절히 섞어놓은 생김새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부릉부릉 브루미즈'와 비슷한 센스라고 할 수 있는데, 반면에 뭉게공항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어느 정도는 캐릭터화한 측면이 있을지라도) 실기의 형상과 크기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으며 심지어 등장하는 기체들 대부분이 실존기체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을 정도입니다.
또한 버디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흰자가 있고 매우 큰 눈을 갖고 있지만, 뭉게공항의 캐릭터들은 칵핏 부분에 아주 자그맣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버디 쪽이 더 귀엽게 보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느낌 이상으로, 캐릭터들 눈 크기가 크기 때문에 캐릭터의 감정이 더 풍부해 보이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뭉게공항에서도 눈으로 열심히 감정표현을 하긴 하지만, 동체 크기에 비해 눈 크기가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드러납니다.
캐릭터 얼굴의 경우 뭉게공항이 실기의 형상을 따라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4. 이야기
▲ 비행기 낚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일리만 나오면 십중팔구는 업무 관련 에피소드.
특히 두 작품이 가장 다른 부분은 바로 이야기에 있습니다.
버디에서 보여지는 이야기들이 대체로 친구들끼리 겪는 소소한 일상이나 모험, 다툼, 등등등이 주를 이루지만 뭉게공항은 각자 자기의 임무, 이를테면 수송기는 화물을 나르고, 전세기는 귀빈수송을 하는 것과 연관되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버디에서도 캐릭터들이 일은 하고, 뭉게공항에서도 캐릭터들이 가끔 '딴 짓'은 하고 다니지만 그 비중을 놓고 볼 때 버디의 경우에는 '딴 짓'에 비중이 더 실려 있는 반면 뭉게공항은 '업무'에 비중이 더 실려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꼬마버스 타요 1기와 2기의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기가 주로 시내버스로서의 일(승객수송)과 관련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반면 2기는 버스들이 선거도 하고 농사도 짓고 우주도 갔다오고…
그래서그런지 몰라도 뭉게공항에서는 작중 개그가 거의 없다시피 한데 버디에서는 개그장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5. 연출
결론부터 말하자면 버디 쪽이 연출을 훨씬 더 잘 했습니다.
뭉게공항의 경우 무조건 캐릭터 얼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서 캐릭터를 항상 비슷비슷한 구도로 비추게 되어서 심심해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테면 거의 캐릭터의 1시~2시 내지는 10시~11시 방향에서 캐릭터 얼굴을 비추는 구도가 너무나도 많이 사용됩니다.) 버디의 경우는 캐릭터가 말하는 순간에도 원경을 비추거나 오히려 캐릭터가 화면상에서 치우치게끔 비춘다던가 하는 식으로 다양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캐릭터의 사실성 측면하고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카메라워크 면에서는 개그포인트 부분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크게 확대해서 보여준다던가, 속도를 내는 장면에서 카메라를 빠르게 회전시키면서 속도감을 더 크게 보여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사용을 잘 한다는 느낌입니다.
그 외에도 장면 구성 같은 것이,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게끔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대사를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장면에서 웃어야 하는지 같은 걸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요.
이 부분은 나중에 버디를 조금 더 많이 접할 기회가 생긴다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 그래픽
뭐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긴 한데 뭉게공항쪽이 그래픽은 훨씬 더 낫습니다. 하기사 버디는 2005년에 나왔고 뭉게공항은 2012년에 나왔으니 당연하지요.
7. 기타
▲ '버디'와 '뭉게공항' 모두 애니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버디의 애니는 헬리콥터지만 뭉게공항의 애니는 관제탑입니다.
▲ 버디에서는 일종의 악역인 '플라비모스' (fly-bee-mosquito의 줄임말인듯…) 일당이 등장하는데 뭉게공항은 작품이 '착해서' 그런거 없다.
그러니까 결론은, 두 작품은 분명 비행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작품을 이끄는 방향성에 중대한 차이가 있고, 따라서 표절로 볼 수 없다라는 겁니다.
두리둥실 뭉게공항은 비행기들을 단순화시키기보다 그 모습과 하는 일 등을 최대한 실제 비행기들의 모습과 가까이 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였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고증이 아주 잘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작진이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라는 상황에 비추어 보면 많이 선방했습니다.) 이는 버디는 물론 다른 유아용 애니메이션들에 비해 큰 차이라 할 수 있으며, 뭉게공항을 특징짓는 중요한 고유의 작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온전히 장점만은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뭉게공항에게는 지루하지 않게 하는 이야기와 연출력을 확보하는 것이 상당히 큰 과제이리라 생각합니다만, 앞서 말했듯이 '현실성'이 뭉게공항 고유의 자산이기 때문에 만약 시즌2에서 시청자를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러한 부분을 포기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좋든 싫든 이미 뭉게공항의 많은 부분이 거기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작진이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버디의 표절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반박하기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사실 표절이 아니라는 것은 dvd 구매 전에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긴 한데 그래도 굳이 dvd를 구해본 것은 똑같이 비행기를 소재로 했고, 3D애니메이션이며,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작품에 대한 호기심도 많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버디가 무려 7년전 작품인데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로 되어 있다 보니까 사고 나서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도 내용이 재미있어서 3만원 값은 하고도 남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DVD를 한 장만 사지 말고 좀 더 사올걸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만약에 국내에서 더빙방영된다면 시청할 용의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너무 오래된 작품이라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봅니다.
최대한 객관적이 되려고 노력은 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국빠가 한국애니메이션 쉴드쳐주는 걸로 비쳐질까봐 그게 좀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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