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츠코의 왼쪽 눈 아래에는 점이 있다. 눈물이 흐르는 길에 점이 난 여성은, 슬픈 사랑을 하게 된단다. 23화 ‘눈물’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2대 레이의 죽음과 함께 에피소드의 큰 축이며, 그 말은 리츠코 또한 레이와 함께 에반게리온이 담는 비극의 중심에 있다는 말이다. 리츠코라는 캐릭터는 꽤나 분명하고 충실히 표현되고 있는 편이며, 그래서 그녀에 대한 감상적 오해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 안에는, 퍼즐과 같이 숨은 부분이 꽤 많고, 쉽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겐 의외로 의문의 중심에 선 여성이기도 하다. 하여, 본 리뷰에서는 리츠코가 조용히 숨기고 있던 몇 가지 아픈 얘기를 살짝 들추고자 한다.
리츠코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는 바로 ‘고양이’이다.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가 작품 속에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설정에 따르면 리츠코는 상당한 고양이 애호가이다. 생각해 보면, 리츠코의 책상에는 커플 고양이 인형이 있고, 사용하는 컵에도 고양이 그림이 있다. 친한 동료 카지 역시 리츠코의 취미를 아는 모양으로, 15화에선 그녀에게 마츠시로 고양이 기념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22화에선 미사토가 리츠코에게 ‘애완 고양이로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네.’라고 했던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겐도우와 리츠코 사이의 관계를 모르는 미사토의 오해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고, 해당 부분의 포커스는 미사토와 신지, 아스카의 관계에 잡혀 있지만 리츠코 입장에서 다시 생각할 가치가 있는 장면이다. 이 정도를 주지한 상태에서, 23화의 초반 부분으로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겠다.
리츠코 "그렇구나, 죽었군요."
…
"네, 아마도 그렇겠죠. 고양이도 수명이 다 있어요."
"그만 울어요, 할머니. 시간 나면, 찾아 뵐게요. 끊어요."
"그래, 그 애가 죽었구나."
이 장면은 간단하지만 임팩트가 크다. 표면적 의미는 장면 속에서 충분히 잡을 수 있다. 리츠코에겐 할머니가 있으며, 그녀가 리츠코 대신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다.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며, 리츠코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한 마디, 그래, 그 아이 죽었구나.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장면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어째서 굳이 여기에 이 장면을 넣었냐는 것이다.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와 무게감을 고려하면, 이 안에는 반드시 중요한 의미와 상징이 있을 것이며, 리츠코에 대한 심층 해석은 따라서, 이 장면의 분석으로 시작한다.
리츠코 "교토에서 뭘 했지?"
카지 "어라, 그거 마츠시로에서 산 거야!"
"속이는 건 소용 없어. 친구로서의 충고야."
우선 이 할머니에 대한 독특한 주장이 있어 짚고 가겠다. 이 할머니가 작품에 이미 나온 적이 있다는 것이다. 15화에서 카지가 마르두크 기관에 대해 조사하는 중, 그와 대화를 나눴던 아주머니 말이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스파이였다. 그런데 같은 에피소드에서 카지가 리츠코에게 마츠시로 기념품을 주는 장면이 있는데, 리츠코는 카지가 몰래 교토(고양이 아주머니와 만났던 장소)에 갔던 사실은 물론, 그가 조사한 내용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눈치다. 마르두크 기관은 리츠코가 개입한 유령 조직인 만큼 민감한 사항은 맞지만 리츠코가 그걸 어떻게? 여기서 만약 23화에 나온 리츠코의 할머니가 ‘고양이 아주머니’와 동일 인물일 경우, 또 리츠코가 그녀와 업무 차원에서도 교류를 한다면 배경 설명이 (좀 지저분하긴 해도)가능하단 것이다. 이 가설을 전제로 둔다면, 23화의 대사 ‘죽었구나, 그 아이.’는 카지의 죽음을 암시하는 대사로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근거 없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가설이다.
통화 내용의 중심이 되는 고양이를 보자. 리츠코에게 고양이란 외로움의 상징이다. 미사토가 펜펜을 기르던 이유와 같이, 그녀는 제3도쿄에서 혼자 살았을 것이고, 그 적막을 이기기 위해서 반려 동물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미사토가 카지와 사랑을 나누며 쓸쓸함을 극복한 것과 같이, 리츠코도 겐도우에 대한 사랑으로 고양이에 대한 애착을 좀 덜게 된 것 같았지만, 이야기가 후반으로 가면서 겐도우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된 리츠코는 다시 또, 그녀에겐 외로움의 상징인 고양이로 눈을 돌린다. 그러니 23화의 통화 장면은, 리츠코의 사랑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통화를 마치고 화면이 비추는 곳. 흰 고양이 인형과, 그 시선을 무시하며 다른 곳을 보는 검은 고양이 인형은 마치 리츠코와 겐도우의 관계를 보는 느낌이다.
"제16사도의 잔해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회수 작업 진행 중에 있음."
"에바 영호기의 코어 부분은 고열 고압으로 인하여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
"D16 알림. 작업을 계속 진행할 것. 자위대의 승인 필요 없음."
…
이 부분은 잠깐 두고, 23화 영호기 자폭 직후 장면으로 가자. 영호기의 잔해를 정리하는 리츠코의 모습. 뒤에 깔리는 무전 음성을 들으면 알겠지만, 리츠코는 지금 레이의 시체를 거두는 중이다. 아마 3대 레이를 위한 영혼 인양 작업에 필요한 재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우리가 유심히 봐야 할 이유는, ‘이 일은 극비에 부친다.’는 리츠코의 대사와, 그녀의 유독 어두운 반응 때문이다. 물론 영혼 인양 작업의 특수성을 생각해 보면 이 작업은 극비 사항으로 하는 게 당연할 것인데, 논제의 핵심은 대사를 치는 리츠코의 태도에 있다. 대본에는 해당 대사 직후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리츠코’라는 기술을 포함하고 있어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아카기 박사님."
리츠코 "…이 사항은 극비로 합니다. 플러그는 회수. 관계 부품은 처분하도록."
"라져, 작업, 서둘러!"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상기할 것이 바로 앞서 살핀 통화 장면이다. 리츠코는 지금 영호기 속의 레이를 회수하여, 다시 그녀에게 영혼을 주고, 생명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고양이에게도 수명은 있어요.’라 말하며 자신이 아끼는 고양이를 보내야 했던 리츠코가, 수명이 없는 레이의 사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녀가 표정 없는 얼굴로 ‘죽었구나, 그 애.’라고 했던 것도, 레이의 죽음에 대해 예견한 장면일 수 있다. 인과 관계를 떠나 상징적 복선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어도 필자는 앞서 2대 레이의 죽음이 겐도우에 의해 계획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리뷰 15편)했으니, 리츠코 역시 그 사실을 알았을 수 있다. 자기가 아끼던 고양이는 한 번 죽으면 끝인데, 겐도우가 아끼는 레이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겐도우의 마음이 자기가 아니라 바로 앞의 레이에게 있다는 사실을, 하루가 다르게 느끼고 있는 그녀는, 자신과 겐도우의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거다. 할머니를 위로했지만, 정작 위로를 받고 싶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리츠코에겐 누구 하나, 아끼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말할 상대가 없었다. 그 따위 문제에 대해 귀를 열고 들어 줄 사람도, 여유도 이 세상에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이라곤 레이를 거두어 그녀를 다시 겐도우 앞에 세우는 것이라니. 리츠코는 그런 멍청한 상황 속에서 모두 다 버린 채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츠코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것’과 ‘극비에 부친다는 것’에 대하여,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의 키타무라는 특이한 가설을 펴고 있다. 리츠코의 이 반응은 물론, 단순히 레이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발설 주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인정한 시점에서, 그는 또한 영호기의 코어 속에 나오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리츠코가 본 것이 LCL이 ‘죽은 나오코를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호기의 영혼에 대한 생각 자체가 애초에 필자와 다르지만 발상이 재밌어 짚고 간다. 우선 반박을 하자면, 영호기의 영혼은 나오코라 볼 수 없으며(리뷰 14편), 리츠코가 본 것은 코어가 아니라 ‘플러그 내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키타무라는 LCL이 육체를 형상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20화에서 초호기에 흡수된 신지가 자신의 의지로 플러그 수트를 형상화한 전례를 들었다. 엔드 오브 에바에서 말하는 인류의 부활 과정도 그와 다르지 않고, 실제로 LCL에 존재하는 영혼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형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본 리뷰(특히 20편)에서도 확실히 설명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사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코어 속의 영혼과, 플러그 내부 LCL 속의 영혼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영호기 플러그 내부에 존재하는 LCL에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2대 레이이다. 만약 키타무라의 주장과 같이 코어 속에 존재하는 것이 나오코라 해도, 2대 레이의 의지가 남은 LCL을 사용하여 나오코를 만들 이유는 없다. 그러니 그의 주장은 LCL과 영혼 형상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나온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를 필자의 주장과 합하면 좀 더 납득이 가는 가설을 만들 수 있다. 정말로 LCL에 2대 레이의 영혼이 녹아 그 의지로 어떤 형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만약 ‘겐도우’라면 어떨까?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2대 레이가 죽기 직전의 연출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레이는 신지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그를 위하여 죽음을 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겐도우의 환상이었다. 그 정도로 겐도우에 대한 2대 레이의 마음이 강했음을 의미하지만, 혹시 리츠코가 플러그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본 것도, 그 환상이 빚어낸 겐도우의 이미지였다면? LCL의 형상화 과정은 영혼의 ‘생각’과 큰 연계를 맺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겐도우와 레이 사이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그 광경 앞에서, 리츠코가 당황하여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나는 것도, 특별히 그것을 극비에 붙이려고 했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
다음 장면으로 가자. 앞서 봤던 할머니와의 통화 장면과 거의 같은 시각, 같은 구도로 나오는 장면이다. 우연히 컴퓨터에 열린 사진은 겐도우와 나오코, 자신의 모습. 나오코와 겐도우의 표정은 리츠코에 비해 밝으며 둘 사이의 거리 또한 본인에 비해 가깝다. 겐도우가 순위를 매긴다면 자신은 한참 뒤에 있다는 걸 알지만, 리츠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잠시 후, 제레가 그녀를 불러 심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카리의 해임에는 충분한 이유겠군?"
"후유츠키를 무사하게 돌려 보낸 이유를 모르는 남자도 아닐 텐데."
"새로운 희생자가 필요하겠군. 이카리에 대한."
"그리고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마침 제레는 겐도우의 배신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22화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달로 날린 겐도우가 제레와는 영원히 적으로 남을 존재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 장면의 핵심에 있는 대사는 ‘겐도우에 대한 다른 희생자’와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이다. 두 대사가 지칭하는 타깃은 바로 다음 장면에 나오는 리츠코인 게 분명하다. 수수께끼와 같은 대사를 넣고 바로 다음 컷에 특정 인물의 모습을 아무 설명 없이 삽입하는 연출은 안노가 가장 즐겨 쓰는 ‘퍼즐 기법’ 중 하나이다. 앞서 카지를 죽인 것이 미사토가 아님을 설명하면서, 리뉴얼 땐 카지 총격 직후 미사토의 문패가 나오는 연출을 삭제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안노는 이런 연출 방식에 대해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연출은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반대로 이 장면의 구성을 통해, 감독의 의도가 확실히 리츠코를 가리키고 있음을 추리할 수 있겠다.
후유츠키 "레이가 살아 있는 걸 알면 노인들이 시끄러울 걸?"
겐도우 "제레의 노인들에겐 다른 것을 낸 상태야, 걱정할 것 없다."
이제 리츠코의 심문 장면이 나온다. 순서로 보아, 리츠코의 사랑에 대한 갈등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인데, 이후 리츠코의 행동이 신지를 불러 레이 더미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리츠코의 심경 변화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장면이며, 이 장면에 대한 이해가 리츠코에 대한 심층 분석의 핵심이겠다. 제레의 입장에선 아까 언급한 대로, 그녀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한 장면이며, 동시에 겐도우에 대항하여 희생을 일구는 것이기도 했다. 겐도우 입장에선 또, 레이에 대한 심문을 거부하기 위해 리츠코를 대신 보낸 것인데, 그 말은, 제레가 표면적으로 요구한 것은 영호기의 파일럿이되, 3대 레이의 부활은 겐도우 타입의 보완 계획의 핵심인 탓에 제레 역시 겐도우가 순순히 레이를 넘길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았단 소리이다. 그러니까 리츠코가 제레 앞에 선 것은 겐도우에게도 제레에게도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제레가 그녀에게 넘긴 ‘진실’이 뭐냐는 것이다. 나오코에 대해? 레이에 대해? 아니면 겐도우의 보완 계획? 겐도우의 보완 계획은 제레 역시 잘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므로 아닐 것이고, 앞의 두 건에 대해서도 리츠코가 모르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 또, 유능한 과학자 리츠코는 언제나 ‘사실’에 대해 열린 사람이며, 다만 ‘로직이 아닌 사랑’에 대해선, 그녀가 겐도우에게 ‘조금 특별한 사람일 거란 믿음’ 때문에 그의 곁에 남은 것이었다. 그러니 제레가 말하는 진실은 그런 종류의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 진실이란, 리츠코가 겐도우 옆에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 즉 ‘믿음’에 대한 것이며 리츠코에겐 같은 말로 ‘사랑’에 대한 것이리라.
킬 "우리들도 조용히 일을 진행하고 싶다. 자네에게 이 이상의 굴욕과 괴로움은 주고 싶지 않네."
리츠코 "저는 아무런 굴욕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만."
"강한 여성이군. 이카리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러나 제레의 심문은 결코 평범한 질의응답 시간이 아닌 것 같다. 가장 먼저,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의문은 ‘어째서 리츠코는 벗고 있는가?’이다. 팬 서비스 연출이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리츠코가 그런 위치에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대본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 ‘리츠코가 옷을 완전히 벗은 채로 제레 앞에 선다.’고 기술하는 만큼, 이 장면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표현된 것이다. 보이는 선에서 해석하고 가자. 이 장면은 우선 리츠코라는 여성에게 제레가 모멸감을 주어, 원래 그것이 레이가 당해야 했을 일인데, 겐도우의 의사에 따라 리츠코가 대신 그 수모를 겪게 됐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카지를 버리는 대신 후유츠키를 옆에 남겼던 것과 같이(‘후유츠키를 무사히 돌려보낸 의미를 모르는 남자도 아닐 텐데.’라는 제레의 대사는 이것을 의미한다.), 이번에 겐도우는 레이 대신 리츠코를 버리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리츠코 입장에선 ‘아픈 진실’이 되며, 결국 그녀는 겐도우에 대항하는 새로운 진실이 되어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세력이 된다. 그 자체로 제레의 계획이자, 겐도우의 선택이자, 리츠코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심문 장면에는 조금 더 깊이 숨은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네를 준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겐도우라구."
어쩌면 이 장면은, 제레나 혹은 그 하부의 사람들이, 리츠코를 상대로 ㅁㅁ한 것을 상징적으로 연출한 장면일 수도 있다. 물론 ㅁㅁ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넓게 생각하여 단순히 옷을 벗은 채로 남자들 앞에 서게 만든 정도로 이해하는 게 무난한데 다만, 프라임 타임에 방영한 애니메이션인 걸 고려했을 때, 저 정도의 연출이 TV에서 허용 가능한 최대한의 수준일 뿐, 실제 상황은 ㅁㅁ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행위가 나타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레는 리츠코에게 굴욕을 주어 미안하다고 표현했으며, 그에 대해 리츠코는 ‘저는 아무런 굴욕도 느끼지 않습니다만.’이라 대답했다. 그 반응에 대해 새삼 감탄하는 제레는 그렇다 쳐도,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질렀던 걸까? 만약 원래 요구와 같이 레이가 그들 앞에 섰다면, 노인들은 레이를 상대로 겁탈할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설마, 그런 일이 으레 있던 상황이었으며, 다만 특수한 상황이라 레이 대신 리츠코를 상대로 ‘하던 일’을 했던 걸까? 이런 다소 충격적인 가설을 전제로 한 보다 자세한 얘기는 차후 레이 편에서 다시 다룰 기회가 올 것이다.
'…레이 대신…내가…?'
신지 "네, 여보세요?"
리츠코 "가만히 듣기만 해. 네 가드는 풀렸어. 나올 수 있을 거야."
리츠코 "진실을 보여 줄게."
BGM Air on the G sting By Johann Sebastian Bach
미사토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리츠코 "…응, 알아. 파괴야. 사람이 아니잖아.
그런데…그런 것에게조차 나는 졌어.
이길 수 없었어!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는 어떤, 어떤 굴욕이라도 참을 수 있었어.
내 몸 같은 거,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었어!"
"근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알고 있었으면서…!
바보였어. 나는!
우리 모녀 둘 다 그냥 바보야!"
"날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아니 그렇게 해 주면 좋겠어."
모멸감을 주는 심문을 받고 나서, 리츠코는 깨닫게 된다. 나는 겐도우에게 있어, 레이의 대용품에 불과했던 거야.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니었어. 제레 앞에서 그 수모를 겪으면서, 리츠코는 겐도우만 생각하며 모든 고통을 감내했는데, 겐도우에 대한 사랑 하나로 버텼던 그녀가, ‘이 자리에 너를 보낸 게 바로 겐도우야.’라는 제레의 한 마디에,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이다.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그에게도 똑같이 느끼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을 시작한다. 다시 네르프에 온 그녀는 조용히 신지를 불렀다. 그녀의 계획은 신지와 함께 도그마로 가서, 그가 보는 앞에서 더미 레이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은 아마, 그녀가 겐도우에게 할 수 없을 ‘복수의 대행’이었을 것이다. 레이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겐도우에 대한 마지막 항의였을 것이다. 겐도우 대신 그의 아들 앞에서 그가 아끼는 레이를 파괴하는 것. 겨우 그 정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사실 겐도우에게 레이라는 존재는 정말 리츠코가 생각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제 더미도 크게 필요 없는 상황이었고, 겐도우는 그저 리츠코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해 조금 ‘언짢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더미 레이를 파괴한 일로 리츠코는 겐도우에게 불림을 받아 감금을 당한다. 사건 이후 처음 만난 겐도우에게, 그녀가 처음으로 꺼낸 한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고양이가 죽었어요.”
리츠코 "할머니에게 맡겼던, 고양이가 죽었어요.
신경도 제대로 못 써 줬는데,
갑자기,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됐어요."
겐도우 "왜 더미를 파괴했나?"
"파괴한 것은 더미가 아녜요. 레이예요."
"다시 묻겠다. 왜 파괴했나?"
"당신에게 안겨도 기쁘지 않게 됐으니까.
…내 몸을 맘대로 해 보시죠? 그 때처럼!"
"너에게 실망했다."
"실망?!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면서!
나한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엄마…!"
내가 사랑하던 아이가 죽었어. 그러나 당신은 물론, 아무도 나를 위로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무척이나 아팠는데, 당신은 그 많은 레이 중 하나를 잃었다는 이유로, 나를 더러운 걸레로 만들었던 거야. 그러나 끝내 겐도우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고, 그것을 기점으로 리츠코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사랑하는 고양이와, 사랑했던 남자를 잃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어머니도 버렸는데, 그렇게 증오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 어머니 마기였다. 그래, 어머니라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 일을 꾸민다. 방화벽의 설치, 그리고 자폭 프로그래밍. 엔드 오브 에바에서, 그녀는 겐도우와 재회한다.
"엄마…."
"마지막 부탁이야. 엄마, 함께 죽어 줘요."
"작동하지 않아?!"
"캐스퍼가 배신을….
엄마는, 끝까지 딸보다 자기 남자를 택한 거군요…!"
그러나 나오코는 끝내 딸을 배신했다. 리츠코는 절망했고, 겐도우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리츠코, 자네를 정말로, 사랑했다네.”
"…거짓말쟁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무음 처리가 되었지만 성우 야마구치 유리코가 인터뷰를 통해 안노에게 연기를 위해 대사를 들었음을 밝혔다. 물론 굳이 밝히지 않아도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겐도우의 말을 듣고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내뱉은 말 ‘거짓말쟁이’는, 나오코가 같은 소릴 듣고 겐도우에게 했던 말과 같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와 달리, 리츠코는 괜찮지 않았을 거다. 그런 파괴적인 사랑, 그녀는 원한 적 없다. 극장판 25화의 제목 ‘Air’는 그녀의 최후 때 흐르는 음악인, 바흐 G-선상의 아리아(Air on the G String)를 의미한다. 이 슬픈 악곡과 함께 리츠코의 비극도 끝이 난다. 리츠코는 겐도우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릴리스는 사실 리츠코에게도 부활의 자격을 주었다. 참 아프게 살다 간 모녀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의미였을까?
[에반게리온] 26. 레이 ① 마음 저 편에/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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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좀 많이 길게 됐군요. 양해를...ㅋㅋ 다음 주 화요일 늦은 밤에 레이 편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재밌게 읽어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굿 나잇!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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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는 어째서 이분처럼 이해하기 쉽게 에바를 설명해주지 않았는가 반성해야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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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 말을안하면 이딜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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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릅니다... 저게 제레의 방식이라면, 후유츠키도 굴욕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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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선생님 글은 추천이라 배웠습니다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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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선생님 글은 추천이라 배웠습니다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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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는 어째서 이분처럼 이해하기 쉽게 에바를 설명해주지 않았는가 반성해야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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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릅니다... 저게 제레의 방식이라면, 후유츠키도 굴욕을................-_-?!! | 13.01.19 00: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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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 말을안하면 이딜도를! | 13.01.19 01: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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