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세계최강을 연인으로 두고 있는 회사원입니다.
전 지금 납치당했습니다. 그래서 곤란해졌습니다.
근무 중이었거든요.
“오호호호! 세계최강의 여자의 연인을 납치했어요. 아무리 세계최강이라고 더 이상 저의 도전을 피할 수 없겠죠.”
금발 혹은 적발 드릴 머리를 하면 어울릴 것 같지만 검정색 포니테일을 하고 있는 미녀가 제 앞에서 웃고 있습니다. 오호호 하는 웃음이라던가, 악역 같은 대사 같은 건 익숙해졌어요. 아, 덤으로 납치당하는 것도. 이 아가씨에게 납치당한 것만 하더라도 이번으로……13번째 인가요. 우와. 숫자가 불길해.
예? 그렇게 납치당했는데 왜 이렇게 여유롭냐고요? 아니 뭐 납치당했다고 하더라도…….
“저기. 슈리엘 씨?”
세계최강 랭킹 77위 슈리엘 양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절 바라봅니다. 이 아가씨 가만히 있으면 미인인데. 뭐, 가만히 안 있어도 이쁘니까 이런 짓도 용서 될라나요.
“뭐죠?”
“회사에 전화 한 통화해도 되나요? 근무 중이었거든요.”
“물론이죠.”
호쾌하게 대답해 주는 슈리엘 양. 이 아가씨 납치는 자주해도 저한테 난폭한 짓은 안 한다니까요.
묶이지 않은 채 그냥 소파에 앉아있던 저는 폰을 꺼내 상사한테 전화를 겁니다.
“상무님. 접니다. 예. 예. 오늘도 납치당했습니다. 반차 써도 될까요?”
폰 너머로 상무님께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사람도 제가 납치 당하는 상황에 익숙해졌네요. 쓴 웃음 짓고 있는 게 훤히 보입니다. 상무님께선 짧게 대답하시고 통화를 끝내십니다.
“아, 미안해요.”
슈리엘 양이 갑자기 사과를 합니다.
“네?”
“나 때문에 귀한 반차를 쓰게 됐네요. 이건 나중에 어떻게든 벌충해줄게요.”
슈리엘 양은 좋은 사람입니다. 납치범이지만.
“아뇨. 괜찮아요.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졸렸거든요. 기다리는 동안 낮잠을 자면 되죠.”
“미안해요.”
“괜찮다니까요.”
어차피 상무님께서도 반차가 아니라 근무한 것으로 해주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뭐. 빚을 만들어둬서 나쁠 건 없죠. ……그래도 풀이 죽어서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거짓말은 찔리네요. 자백합니다.
“상무님께서도 근무한 것으로 해주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으으. 이번 달 단가 5퍼센트 늘려주겠다고 말해야겠네요.”
그랬다간 상무님께서 자발적으로 납치당하라고 압박을 주실 거 같은 기분이네요. 이 아가씨 우리 회사의 갑이에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보시다시피 공정한 성격이라 갑질은 안하지요. 가끔씩 갑이라는 입장을 이용해서 절 불러내서 납치하는 것을 빼면요.
“저, 졸린데 기다리는 동안 자고 있어도 되나요?”
“소파보다는 침대가 안 낫나요?”
“침대에 누워버리면 깊게 잠들어버려서 밤에 잠을 못자요.”
“응. 잠시만 모포 가져올게요.”
모포를 찾기 위해 인질인 절 혼자 두고 방을 나가는 슈리엘 양. 이 아가씨 착하다니까요. 가끔씩 절 납치하는 것을 빼면요.
문득 잠에서 깨어나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퇴근 시간입니다. 소파에서 잠들었는데 깊게 잠들고 말았습니다. 이거 밤에 잠 못 자게 됐네요.
꼬르륵! 우와 배고파.
저는 소파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핍니다. 슈리엘 양이……저랑 얼마 떨어지지 않은 책상에 엎드려서 자고 있네요. 이 아가씨 납치범이 왜 이리 무방비한가요.
그런데 제 연인은 왜 이리 안 오는 걸까요. 세계 어디에 있어도 1시간이면 오는데. 싸움 중인가?
저는 폰을 꺼내고 1번을 길게 누릅니다. 저장된 번호로 전화가 연결됩니다. 착신음이 들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습니다.
“자기? 어디야? 퇴근했어? 나 보고 싶어서 전화한거야?”
콧소리 섞인 애교 있는 목소리입니다. 믿기진 않겠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세계최강입니다. 하지만 제 연인이죠.
“네. 보고 싶어요.”
“아이 참. 자기는. 어차피 조그만 있으면 만나잖아. 자기가 이렇게 어리광 부리면 참고 있는 나도 어리광 부려지고 싶어지는 걸. 조금만 기다령.”
제가 납치당했는데 긴장감이 없네요. 이러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네요. 강하고, 매력적이고, 돈 많고, 착하지만 슈리엘 양 가끔씩 나사가 빠져 있다니까요.
“저 납치당했어요.”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폰이 벽돌이 되어버렸습니다. 폰 너머에서 살기를 뿜어내는 것만으로 이쪽 폰이 고장 나버립니다. 이러니 저를 납치하면 사전에 제 연인에게 연락해줬으면 좋겠네요. 요즘 폰 수리비도 만만치 않은데.
위치는 모르겠지만 제가 납치당했다고 했으니 세계 어디에 있어도 1시간 안에 도착하겠죠.
“슈리엘 씨. 슈리엘 씨.”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슈리엘 양을 깨웁니다. 우와. 다 큰 아가씨가 침. 손수건을 꺼내서 입 주위를 가려주고 다시 슈리엘 양의 어깨를 흔듭니다.
“슈리엘 씨.”
부스스 슈리엘 양이 상반신을 일으킵니다. 슈리엘 양은 소매로 입 주위를 닦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더니.
“5분만 더.”
라고 말하며 다시 엎드립니다.
“영원히 못 일어나는 수가 있어요. 일어나세요. 세계 최강이 온다고요. 세계최강이랑 싸우려고 절 납치한 거잖아요.”
슈리엘 양은 기어코 5분을 더 엎드려있다가 일어납니다.
“하암!”
다 큰 아가씨가 남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네요.
“곧 있으면 세계 최강이 와요. 정신차리고 준비하세요.”
“엥? 왜?”
슈리엘 양은 한번 잠들고 다시 일어나면 머리가 부팅 되는데 오래 걸리나 봅니다.
“저 납치했잖아요.”
“누가?”
“……주무세요.”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슈리엘 양은 다시 책상에 엎드립니다. 이럴 거면 절 납치한 의미가 없잖아요. 슈리엘 양이 얼빠진 미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재차 깨닫게 됩니다. 세계최강 랭킹은 77위지만 인기는 10위권에 들어가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공짜로 반차를 얻었다고 생각해야겠습니다. 저는 제가 덮고 있던 모포로 슈리엘 양을 덮어주고 방을 나섭니다.
높이 77층짜리 ‘슈리엘 빌딩’(랭크가 올라갈 때마다 그 층수도 줄인다고 하네요. 돈지랄이 따로 없네요.)을 나와서 가까운 공터에서 기다립니다.
“자기야!”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처럼 시야가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나서 사뿐히 제 품에 안깁니다. 무겁지만 무겁지 않아요. 무겁다면 그건 사랑의 무게입니다.
소개합니다. 제 연인인 에란다입니다. 세계최강입니다. 취미이자 특기이며 직업은 세계구원. 이미 세 자리 수 단위로 세계를 구했습니다.
“자기야, 괜찮아? 다친데는? 아픈데는? 야한 짓은 안 당했지?”
하지만 근무 시간(자율) 외에는 질투심과 전투력이 조금 강한 여자일 뿐입니다. 저는 제 몸 여기저기를 주무르는 연인의 목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달랩니다.
“괜찮아요. 납치당하고 지금까지 자다가 나왔으니까요.”
“자는 동안 무슨 짓은 안 당했지?”
“슈리엘 씨니까 나쁜 짓은 안 했을 거예요.”
납치는 했지만.
에란다는 저를 잠시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제 가슴에 기댑니다.
“미안해. 맨날 나 때문에.”
제가 거의 매일 납치당하는 것에 대해서 사과하네요.
“그런 말 안하기로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연인이 좋아하는 것을 해줍니다. 쪽. 네. 키스요.
“에헤헤.”
귀여워. 세계최강이지만.
“그런데 슈리엘은?”
“오호호호호호호!”
악역 같은 웃음소리가 저 대신 대답합니다. 일어났나보네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세계최강!”
공터로 슈리엘 양이 들어섭니다. 입가에 침 자국이 있고 이마는 엎드려 자느라고 눌려서 붉게 변해있습니다. 누가 봐도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네요.
“제가 방심하던 사이에 연인을 구출한 것은 높이 사겠어요. 역시나 세계최강이군요!”
아니 구출 했다기보단 그냥 제가 걸어 나왔는데요. 제가 깨워도 안 일어났고.
“하지만 저에게 따라잡혔으니 그냥 놓아줄 수는 없지요! 오늘 제가 세계최강이 되겠……”
연인이 제 품을 빠져나가더니 슈리엘 양에게 달려들면서 제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일격이 한 방.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슈리엘 양이 사라집니다.
이공간추방권. 주먹에 막대한 에너지를 실어 휘둘러 맞은 상대를 이공간으로 날려버리는 기술입니다. 일격필살기 중에 하나에요. 커맨드는 기 소모 없이 약손A. 연타하면 가끔 이세계로 향하는 게이트가 열리니 주의하세요.
“자기야. 가자. 나 배고파.”
사람 하나를 이공간으로 날려버렸으면서 가벼운 태도로 다시 저에게 달라붙은 연인.
뭐. 슈리엘 양이라면 이걸 맞아도 될 정도로 튼튼하니까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겠죠. 공격력 스텟은 낮지만 체력과 방어력, 근성 같은 생존 쪽으로는 극한을 찍었으니 말이죠. 일격필살기를 맞는 것이 오늘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납치범이잖아요.
“오늘은 뭘 먹을까요?”
“날 먹어줘.”
“밥 먹고 난 후에요.”
연인이 세계최강이라 이런 저런 험한 일을 많이 겪기는 합니다만 뭐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만합니다. 가끔 연인에게 ‘세계를 나에게 줘.’라고 말하면 세계를 가볍게 정복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안 할래요. 하루에도 수 차례 멸망할 위기가 일어나는 골치 아픈 세계를 정복해봤자 뭐가 좋나요.
“에헤헤.”
그런 거 할 시간에 그냥 연인이랑 알콩달콩 지내는 게 훨씬 나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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