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제 어쩔래?"
장치는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리되었다. 모두가 바보같은 계획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어째선지 도와주었다.
"이걸 타고 이 지옥에서 날아가기라도 하면 되는거야?"
"됐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있나."
"간직하자고. 이번 겨울을 무사히 보낸 기념품이야."
"아직 3분의 1은 남았지만."
"3분의 2라도 어디야."
"달력은 잘 세고 있지?"
"달력?"
"아. 아시다시피 여기선 의미가 없거든요, 날짜라든가 시간이라든가 그런 건."
"그래도 계속 세고는 있어."
"왜요?"
"아직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싶으니까."
창문을 덮은 천을 살짝 열어보았다.
바깥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눈을 맞고, 붉은 흙먼지는 얼어붙어서 날리지 않았다.
"오늘 따라 눈이 펑펑 내리네."
"그럼 같이 눈사람이라도 만드실래요?"
"조니!"
"농담이잖아요."
"애도 아니고."
"그나저나, 저거 다 만들어놓고 보니 물건인데요."
"꽤 멋있지 않아?"
"제 말은-"
"-마치 여기에 원래부터 있어야 할 물건처럼 자연스럽네."
"그럼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남았네만,연구자 양반."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항했다.
"자넨...이걸 쓸텐가?
이 타임머신인가 뭔가 하는 괴상한 걸 말이야."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말을 해보라면 끝도 없지.
우선 가장 중요한 문젠데,
이건 비전문가들이 당신 기억에만 의존해서 만든거야. 쉽게 말해서 야매라고."
"설계도면은 확실히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기억한다고-"
"제 평생을 바쳐 한 연구인데, 기억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닙니까?"
"우리가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면 어쩔텐가? 완벽한 장비를 갖춘 것도 아니고."
"몇 차례 확인을 했지만 완벽합니다."
"모든 기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차가 존재한다네."
"핵심 부품 구동에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임상 실험은 누가 할 거지?"
"제가 할 겁니다."
"뭐?"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래도..."
"그거 아나? 자넨 지금 너무 성급해."
"장치에는 기본 시간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늦게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오차가 커져서 더 이후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안 그래도 수리중에 틈이 더 벌어졌을텐데 더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어, 그럼...
작별인사를 해야 하나요?"
"작별인사?"
"만약 지금까지 그 쪽이 한 말이 사실이면... 그... 진짜로 과거에서 오신거면.
돌아가는 거잖아요? 집으로."
"넌 이게 진짜 작동할 것 같냐? 확실히 그럴 듯해 보이긴 해도, 내 생각엔 그냥 옛날 D휠의 일종 같은데."
"그것보다 훨씬 크고 덮개도 있고 정교하지만."
"아무튼! 그냥 농담삼아 타임머신이네 하는 거니까 지켜보기나 하자고."
"진짜 작동하면 어떻게 되는건데?"
"잘 굴러가면 심심할 때 타고 놀지 뭐."
"형은 저 사람을 안 믿는거야?"
"같이 일하다보니 괜찮은 사람이란건 알겠지만... 애초에 말이 안 되잖냐, 타임머신 같은 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난 인사라도 하고 올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십니까?"
"아, 아뇨.
있죠, 혹시 정말 옛날로 돌아가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말해주세요.
별 생각없이 보내는 일상이란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그리고..."
"그리고?"
"...모멘트란게 결국엔 어떻게 되어 버렸고, 그것이 초래한 게 어떤지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걸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가능할 겁니다. 제 스승님이 유명한 학자셔서, 학회 쪽에 연락을 해 보면-"
"너무 이야기가 진지하게 흘러가는 거 아냐?
그럼 빨리 시작하자고, 저게 진짜든 말든 간에."
112일째의 일지다.
모두의 희망을 증명하려 미래로 갔던 나는, 끝없는 수렁을 품에 안고 돌아간다.
일주일, 혹은 몇 년이 지난 시점으로 돌아갈진 아직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지금의 미래는 바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믿어주진 않지만, 모든 것이 끝난 후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분명히 "원래대로" 돌아갔을 것이다.
반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나와 함께 했던 모두가 웃고 있을 세상으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왔던 곳으로 돌아왔다.
근데 어째선지 주변이 어둡다.
손을 더듬어 벽을 짚었는데, 스위치 같은 게 눌려 불이 켜졌다.
나는 무슨 창고 같은 곳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녹이 슨 장치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먼지가 자욱해서 기침이 났다.
갑자기 근처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얼떨결에 도망쳤다.
운 좋게 뒷문이 열려 있었다.
영문을 모른 채 뛰쳐나와버린 세상에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걸었더니,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종소리가 들린다.
"엄마, 저 아저씨 뭐하는거야?
눈 많이 내리는데 우산도 안 쓰고 있어."
"무시하렴."
"왜?"
"너도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되는거야. 알겠니?"
"으, 으응..."
한참동안 멍하니 서서 두 사람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아이의 손을 잡은 여인이 홱 돌아서더니 소리쳤다.
"뭘 봐요? 줄 돈 없어요!"
그러고는 계속 하얀 길을 걸어깄다.
발자국 네 줄이 나란히 눈밭에 남았다.
"신분증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신분증이요?"
매점 직원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서 예전에 쓰던 걸 내밀었다.
레이저 빛이 한 번 반짝한 다음에, 직원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뭐 불결한 거라도 되는 듯, 만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인식이 안 되는 걸 보니 이 구역 주민이 아니시네요. 여기서 당장 나가주세요."
"그게 무슨-"
"거부하신다면, 지금 당장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전 이 도시에서 20년 넘게 살았어요!!!"
닥치는 대로 달려서 또 어딘가로 왔다.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아까 그 창고였다.
"이 녀석! 아무도 없잖아. 조용히 해.
이거야 원, 또 잔챙이 놈들이 눈 피하려고 들어왔었나..."
커다란 개가 계속 짖고 있었다.
"...음?
뭐야. 저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야! 까칠하게 굴기는."
개를 달래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노란색 줄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저기,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마커 없는 사람은 엄청 오랜만에 보네? 행색을 보아하니 저 너머에서 온 사람도 아닌데...
그래. 뭔가?"
"이 창고는 뭘 하는 곳입니까?"
"창고?
아. 당연히 창고니까, 물건을 보관하고 있지."
"무슨 물건을?"
"이름이 기억 안 나는데. 예전에 엄청 유명했던 박사가 있었거든.
근데...
하필 노인네가 말년에 노망이 들어서, 결국 실험 중에 사람 하나가 실종되었다지 뭔가."
"노망난 게 아닙니다."
"뭐?"
"아,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종자는 사망처리 하고, 그 노인네는 감방에 갔다가...
병이 나서 금방 죽었어."
"돌아가셨다고요?"
"내 생각이긴 하지만, 그 영감 분명 치매였던게야. 그럴싸하지 않나?
그래도 불쌍해. 한창일때는 기부도 많이 하고, 인성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관련된 자료는 전부 폐기하라고 했는데, 이건 버리기 좀 아까운 물건이었는지-
여기 그냥 쳐박아 놓는걸로 끝냈어."
"그 날이 언제쯤입니까?"
"으음...
글쎄.
한 5년 됐나?"
"5년?"
"맞을걸?"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됩니까?"
"뭔데?"
"집을...좀 찾는데요."
"집?"
"그, 가로등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보도블럭이 바람개비 모양이고, 가다보면 길 가에 제비꽃이 무더기로 피어있고...
거기 끝에 지붕이 파란 슬레이트, 철로 된 대문이 달린 집이요."
"아. 거기 파란 지붕 집?"
"아세요?"
"알지. 저 길 쭉 따라가면 있어. 엄청 유명해."
"유명하다고요?"
"거기 사는 아가씨가.
가족들도 다 이사갔는데 혼자 남아있거든.
끼니도 제대로 안 챙겨먹어서, 동네 사람들이 살아있나 쓰러졌나 맨날 확인하러 가."
"어째서...?"
"낸들 아나.
들리는 소문은 상사병이라는데, 어린 애들 퍼뜨리는 소문이란게 다 그렇지 뭐-
-어딜 그렇게 달려가?"
길 끝에 정말로 집이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른 집들은 다 헐린 모양이었다.
창문은 커튼으로 닫혀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밤이라서 자는 거겠지 싶었다.
크게 불러볼까 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날 원망하고 있진 않을까?
"그러니까, 어딜 그렇게 미친 강아지 마냥 튀어가고 그러는건데?"
"아저씨."
"왜?"
"잠깐 안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어...근데 왜?"
"그게, 그, 제가 사실...
그 유명한 박사님 친척 동생이라서요!
유품이라고 하니 한 번 보고싶네요!!!"
"아, 그래? 그럼 괜찮고 말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이따가 팁이나 조금 줘."
다시 그 기계 앞으로 돌아갔다.
이 장치는 박사님과 함께 만든 것이니 원하는 곳으로 돌아갈 때는 오차가 없다. 적어도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저기 뒷문 열린 거 보이지?
요즘 따라 이상한 놈들이 들락거려.
저번에는 엄청 이상한 옷 입고 긴 머리한 꼬마애를 잡았는데,
코스튬 플레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그냥 보내줬다니까."
"아저씨."
"왜?"
"죄송합니다."
"커헉!"
배 정중앙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쓰러진 경비원을 받아서 바닥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이거요.
미래엔 은행이 망해서 아무 쓸모 없거든요.
전부 드릴게요."
지갑에서 돈을 다 꺼내 손 위에 올려놓았다.
"뭐야. 역시나 아무 일도 없었어?"
"잠깐 반짝하고 끝났네."
"다녀왔습니다."
"저기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을 뿐인데...
완전 만신창이에 먼지투성이가 됬네?"
"험한 일을 겪었어요."
"그럼 진짜..."
"성공한 거 맞아?"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태워드리겠습니다. 줄이라도 서실래요?"
"그, 그럼 저요!"
"아니 저부터-"
"그만!"
전에 봤던 박사가 소리쳤다.
"당장 멈추십시오. 이건 중대사안 입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모두가 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좀 하죠.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공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왜 돌아왔냐구요?
...모르겠습니다. 그냥...
오차가 5년 정도 있었는데,
그 동안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박사님 말이 맞았습니다.
평생을 연구한 자료는 전부 폐기됐습니다.
저는 그냥 없었던 사람이 됐고,
제 은사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그걸로 끝이었어요."
늦은 밤에,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다들 뭘 망설이는 거에요?
내일 당장 생존자들을 모읍시다.
그 다음엔 저걸 타고 모두 돌아가는 겁니다."
"「돌아간다」라고?
어디로 말인가?"
"모두가 행복했던 과거로요!
모두를 이끌어 준 사람이 있던 곳으로!
그 전설의 듀얼리스트...
싱크로를 올바르게 사용했던, 새틀라이트의 「영웅」이 있었던 시대로요!"
"조니. 내 한 마디만 하지.
우리가 여기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후에는 누가 있게 되나?"
".....그, 그건."
"여기서 돌아갈 생각인겐가?
그렇다면 우린 패배한걸세.
영원히 반복되는, 멸망이라는 이름의 쳇바퀴에 갇혀서!
그저 과거로 도망치기만 하는 패자가 되는거야!!!
자넨 그걸 원하나?
당장의 행복을 위해 미래를 버리자는 건가?"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혼내는 일은 슬슬 그만하시죠.
저한테 아주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뭡니까?"
"간단합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문제 말입니다.
모든 문제엔 가장 간단한 해답이 있습니다.
바로 「원인」을 없애버리는 거죠."
"무슨 뜻이지?"
"우리는 오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 지경을 초래한 과거의 유물을 말입니다."
"자네가 뭔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군."
"본론을 말하죠.
우선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싱크로 소환이고 모멘트고 전부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 후엔 과거의 기술력을 빌려서 더 과거로 돌아가는 겁니다.
아예 말살시켜 버리는 겁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듀얼몬스터즈」 그 자체를-"
"참다 참다 못 들어주겠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자빠졌나!!!!!"
"박사님!!!"
"우리를 이 지경으로 몬 게 뭐라고 생각하나?!
「듀얼몬스터즈」?
「싱크로 소환」?
「모멘트」?
그보다도 앞선게 있지.
사람들의 부정적인 마음이야!!!
자신만을 위해 남을 해하고, 그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그 마음 말일세!
자넨 우리가 했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어.
미래를 사는 우리들을 위해, 과거의 그 영광과 행복들을 죽여버리자고??
이 재앙을 겪고서도 어째서 반성한게 없나!!!!!"
"...그래서."
"다들 그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뭐라?"
"다른 방법이 있기라도 합니까?
당신이 말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사람들의 부정적인 마음은 무슨 수를 써도 멈추지 않아!!!
멈출 수 있기라도 했으면, 진작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다들 그만해요!!!"
한참동안 두 사람은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마디만 하죠. 박사.
지금 이렇게, 선을 위하고 도덕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지만.
당신도 언젠가는 내 생각에 동조하게 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일어서서, 복도 끝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