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게-"
"도면은 외우고 있습니다."
"외웠다고?"
"위험 구역에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뭘 바라시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지.
그쪽을 대체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러니까 전 정신병자가-"
"슬슬 그만합시다, 박사님."
고글 쓴 남자가 꺼내왔던 책을 다시 높이 쌓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잖아요? 이 사람이 진짜로-"
"미친 소리!"
"정말이라니까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니까요.
당신이 하는 얘기가 증거가 있든 없든 간에."
"그 실험은 실패했어! 프로젝트는 영구 정지, 피실험자는 실종.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건가?"
"잠깐 창문 좀 열게요."
쇠로 된 창틀이 열렸다.
창문을 열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여의치 않았던 건지 온통 천 같은 것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먼지바람만 부는 창을 열어서 뭐에 쓰려고."
"아뇨. 손을 잠깐 뻗어보세요."
"...음."
"무슨 일입니까?"
"아."
고글 쓴 남자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바람이 차갑네요.
그러니까 제 말은-"
"슬슬 겨울이야."
"네. 그거요."
"식량은?"
"기본적인 문제들은 아직 없어요."
"...그렇군."
"박사님, 아까 하던 이야기 말입니다."
"자넨 기어코 포기 안 할 생각인가?"
"확실히 그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그걸 넘어서 아예 역사에서 지워졌고.
저 사람이 거짓말을 했을 확률이 높다는 건, 저도 부정 안 하겠습니다."
"본론부터 말하게. 우린 빨리 겨울 날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겨울 날 계획이라.
정확히 할 게 뭐가 있죠?"
"연구소 보수는 봄에 끝냈고, 생필품은 괜찮고, 자료 정리는 됐고, 그리고 또..."
"솔직히 말해보세요.
어차피 겨울엔 밖에도 못 나가고, 할 수 있는게 없잖아요."
"수도 쪽 잡보수는 아직 남았어."
"그건 어제 저희 조가 끝냈어요."
"그래서 말하려는 건 그건가?
그 타임머신인가 뭔가 하는 걸 고치자고?"
"박사님, 아시잖아요.
지금 우리한텐 뭔가 열중할 게 필요해요.
겨울 내내 같이 이야기도 하고, 같이 힘을 합칠 수도 있는 그런 일이."
"실패한다면 어쩔 생각이지?"
"그렇다면 그 과정만으로도 된 겁니다.
다들 우울한 걸 잊고, 잠시나마 열정을 되살렸으니까요."
"굳이 이걸 해야만 하는 이유는?"
"겨울이 와요.
겨울이 지난 후엔 또 겨울이 오고.
지금 이대로라면 우린 계속 겨울을 지내고, 지내는 일만 반복할 겁니다.
조금이나마 희망이 필요해요.
우리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설령 그게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걸로 다들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나?"
"으음, 다들 행복하다...는 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굉장히 행복해 할 겁니다.
제정신인게 맞든 아니든간에."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래.
멋대로 하게.
다만 실패해도 책임은 못 져."
"감사합니다!"
"추락지점이 멀지 않으니 회수는 쉬울거야.
그렇다고 지천에 기황병들이 널린 상황에서 방심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같이 갑시다."
방문을 열고 나온 남자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아아, 다행이네."
"믿어 주시는 겁니까?"
"사실 타임머신 같은 건 잘 모르지만, 다른 건 잘 알겠으니까요."
"무엇을?"
"그 쪽의 두터운 신념. 덧붙여서 의지도."
그 말을 끝내고는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딱 하나 찾은 게 있어요.
과거에 정말 타임머신 실험이 있었답니다.
동물 상대로 임상실험까지 성공했는데, 어째선지 첫 피실험자는 실종됐다고.
프로젝트를 지도했던 교수는 감방에 갔다네요."
"제 스승님입니다."
"여기 적힌 바로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실은 피실험자가 그 교수의 애제자-
잠깐, 방금 뭐라고요?"
"그 교수가 제 스승님입니다."
남자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마구 넘기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계속 그걸 반복했다.
나는 앞 뒤로 넘어가는 종이 구석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생각난 거지만...
실험은 사실 성공했다.
하지만 피실험자는 실종되었다.
근데 「실종」된 게 아니라-
그냥 돌아가지 못한 거라면?
「동물」을 상대로 한 실험이 실패하지 않았던건.
왜냐하면...
기황병들의 타겟은 「인간」이니까.
그래서 기황병들한테 장치가 격추당하고.
결과적으로 내 옆에 지금 서 있는 사람이-"
"저 말입니까?"
"지, 지레짐작인가...?
아님 박사님한테 다시 돌아가야 하나?"
"저기요?"
"정말 타임머신이란게 있었던거야?!"
책장이 하도 세게 넘어가서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고글 뒤 빈틈에 약하게 꿀밤 한 대를 먹였다.
"으아아!
포, 폭력은 반대입니다!"
"잘 되어가나?"
"순조롭습니다. 65%는 끝났어요."
"어서!!!"
"뭐, 뭐야?!"
"다들 모두!
모두 나와봐요!!!"
간만에 연구소 문이 열렸다.
고함소리에 이끌린 사람들이 뒷뜰로 모여나왔다.
모두가 똑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얀색 솜털 뭉치 같은 게 날아와 손끝에 닿았다.
그러고는 한 방울로 녹았다.
조금 기다리니 두 손바닥에 소복하게 쌓이고, 눈 앞에 허옇게 입김이 서렸다.
"올 해 첫눈이네요."
"그러게."
"함박눈인걸. 작년엔 이런 적 없었는데."
전에 봤던 그 박사가 소매 끝에 쌓인 눈을 털어내곤 말했다.
"그거 알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 겨울은 왠지 굉장할 것 같은 기분이야."
하얀 마스크를 쓰고 철근 하나에 걸터 앉았다.
한참 후에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저기.
그렇게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 나요."
"곧 들어가겠습니다."
맨손으로 쌓인 눈을 조금 집었다.
아직은 흙바람를 맞지 않아 깨끗한 하얀색이었다.
88일째의 일지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다 잊어간다고 생각했지만.
멀리 보이는 그믐달과, 쌓여만 가는 눈과,
너무나도 고요한 이 잡동사니 들판에,
왠지 모를 보랏빛 향이 있어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