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서 죄송합니다
모바일 앱으로 쓰고 있었는데
앱 자체가 깨져버려...허헣헣...리셋.....
31일째의 일지다.
시간만 보내는 날은 유난히 불안하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게 더 기운빠진다.
모든 게 만족스럽지 못한 날엔 그 애가 내 옆에 딱 붙어서,
"확실히 오늘은 완벽하지 않은 날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내일은 분명히 행복한 날일거야.
모두가 이렇게 열심이잖아!
사는 일도, 함께하는 일도."
하고 말해주곤 했다.
32일째의 일지다.
이 곳 사람들이 날 정신병자 취급하는 이유는, 생각해보니 간단했다.
「실험」이 실패했으니 당연히 기록이 남을 일이 없는 거다.
잘못이나 실수란 건 높으신 분들이 항상 덮어버리기 마련이니.
너덜거리는 다리뼈를 질질 끌고 길을 나섰다. 목적도 의미도 없지만, 이거라도 안하면 돌아버릴 것 같다.
수 백명의 사람들이 날 기다렸겠지.
결집된 소망으로 모두가 바라는 미래를, 내가 말해줄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을거다.
그리고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통곡한다.
오늘따라 상처가 쓰리다.
"이봐."
무쇠가 뼈다귀마냥 늘어선 폐허로 들어가려던 참에 누가 날 막았다.
본 적 있는 백발의 남자였다.
"여기서부터는 위험할텐데."
"그냥 산책중입니다."
"그걸로 괜찮은거야?"
"저 너머엔 뭐가 있길래 그러는 겁니까?"
"어...
일단 썩 좋은 건 아냐."
"그럼 지나가겠습니다."
"무모하긴!"
"가야합니다."
"이유가 뭐냐니까?"
"모든 걸 봐야하는 게 제 임무였습니다."
"또 헛소리를-"
"몇 번이고 말하는건데.
전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남자가 머리를 한 움큼 쥐어뜯고 철골 위에 앉아있다가, 포기한건지 손을 저었다.
따라오라는 표시렸다.
인기척은 전혀 없는 장소였다.
걸음을 떼면 판자 삐걱이는 소리만 났다.
발 끝에 힘을 주니, 말라 비틀어진 무언가의 조각은 맥없이 부스러졌다.
"변함없이 고요하고, 암울하고, 기분 나쁘지."
동행인은 익숙한 흰 마스크를 내밀었다.
"받아."
"왜-"
"알잖아.
애들이 진폐증으로 많이 죽었어."
"아이들도 있었습니까?"
"물론."
"하지만-"
"우리 연구소엔 넷이 있었는데.
둘은 병이 들고.
하나는 철골을 잘못 건드렸다가, 시체도 못 찾게 되어버렸네."
"나머지 하나는?"
"아. 걔는.
망가진 크레인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어.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봤는데, 엄마 아빠가 많이 보고 싶었대."
까마귀 한 마리가 성을 내며 날아갔다.
무덤덤하게 말을 마친 동행인이 얼룩진 돌 한 조각을 주워 철제 가로등에 던졌다.
누렇게 색이 바랜 유리가 마지막 틈을 벌려 깨지고, 돌멩이는 가로등 줄기에 부딪혀 쨍 하는 소리를 낸 후 흙바닥을 굴렀다.
그 후 모든 것이 고요했다.
또 한참을 걸은 후엔 아담한 봉우리에 도달했다.
까마귀 두 마리가 익숙한 표지판 위에 앉아있었다.
[『네오 도미노 시티』]
"이래서 내가 오지 않는 게 좋을 거라 한 건데."
나도 모르게 손을 떨고 있었다.
"찾는 게 있었던 거지?
스스로한테도 산책이라 속이면서,
사실은 애타게 찾아 헤메고 있었잖아."
"그걸..."
"똑같은 바보짓을 한 선배가 충고해줄게.
눈을 감고 걸어.
기억을 따라가.
그냥 그거면 돼."
온 세상이 까매도 머릿속엔 그걸 그렸다.
은은하게 빛나던 가로등과,
비를 먹고 젖은 잔디 몇 움큼과,
같이 걸었던 바람개비 보도 블럭 무늬와,
길가에 듬성히 핀 제비꽃.
그리고 익숙한 철문.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익숙한 철문.
녹이 슬고 박살나서 나뒹구는 채로 그렇게 내팽개쳐져 있었다.
난 뭘 기대했던걸까.
손에 아무거나 집히는대로 잡았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 조각이 비웃기라도 하듯 그믐달 모양으로 조각이 났다.
"방금 주웠는데, 이건 아직 쓸만해."
동행인이 녹슨 삽 한 자루를 건넸다.
난장판이 된 집터를 마구 헤집었다.
"무슨 사이었어?"
"궁금하세요?"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아주 소중한 사람이였나봐."
".....그냥...
..그냥 소꿉친구에요."
"그런가."
"...친했으니까, 그 애 동생이랑 셋이서 놀이공원 가기도 하고."
삽 끝에 뭔가 걸렸다.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두꺼운 플라스틱 커버로 된 공책이다.
페이지가 하나 둘 씩 넘어갔다.
「일기장 첫 번째 날.
내일이 바로 기다렸던 그 날이다!
내일부터는 매일 매일 사는 세상이 새로울 것 같아서, 특별히 일기장을 샀다.
우리가 다다를 곳.
우리가 추구하는 곳.
미래란 건 얼마나 굉장한 곳일까?
실험 때 실어보낸 곰인형과 교수님 댁 목도리도마뱀은 말을 못 하지만,
그 애가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이번에 실패한다고 해도 우린 영원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시행착오란 것도 성공의 과정이니까!
내일 그 애가 모든 걸 끝내고 돌아온 후엔, 집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할 거다.
직접 만든 카프레제에 로스트 비프를 사 와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열고 싶다.
그 애가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다른 사람 초대하는 건 안 되겠지만, 둘이서라도 충분하다.
파티가 끝난 다음엔, 준비해놨던 선물도 줄 거다.
좋아하는 보라색 털실로 직접 짠 목도리다.
솜씨가 아직 서툴러서 방울 같은 건 못 달았지만. 그 애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일 밤에 말 할거다.
아주 오랫동안 미뤘던 일이지만, 내일은 말 할거다.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말 할거다.
그만큼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일기장 두 번째 날.
그 애가.
돌아오지 않았다.
교수님은 사기꾼으로 몰려 감옥에 가셨다.
뭐가.
뭐가 문제였지.
사물도 동물도 멀쩡했는데.
왜 사람인 그 애만 돌아오지 못한걸까.
그래, 어쩌면 그냥 늦는 걸 수도 있다.
그 애가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다.
매일 밤 집에 오는 길도 함께였고, 우린 15년 가까운 세월동안 친구였다.
그 애가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다.
그냥 조금 늦는 것 뿐이다.
기다리면 다시 돌아올 거다.
"미안, 늦었네."하고
늘 한결같던 표정으로 그렇게 말 해줄거다.」
「세 번째 일기.
눈 떠보니 병원이다.
의사 선생님 말이, 내가 며칠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한다.
링거 맞고 집에 돌아왔다.
때마침 돌아왔는데 내가 집에 없다고 하면 그 애가 슬퍼할지도 모른다.」
「네 번째 일기.
모두가.
갈 길을 잃었다.
모두가.
울고있다.
가족들이 집 밖으로 어서 나오라고 재촉한다.
이젠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멋대로 죽어버리면 영영 그 애를 못 보게 되어버린다.
이 일기장을 마지막으로 여기에 남길거다.
혹시 그 애가 돌아온다면 길을 잃지 않도록.
보고 있니?
지금 어디에 있니?
너도 하늘이 보여니?
네가 뭘 하고 있든.
네가 날 기억하든 말든.
네가 있는 세상에선 모두가 웃고 있으면 해.」
먼지 먹은 바람이 섬처럼 쌓인 잡동사니 사이를 울고 울며 헤쳤다.
표지판에 앉았던 두 마리 까마귀 중 하나가 어느 틈 새 날아가 버렸다.
남은 한 마리가 홀로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그래.
울어.
울다 지쳐 울지 못하게 되어버릴 때 까지 울어.
난 그때서야 멈출 수 있었어."
"누굽니까?"
"응?"
"누가 이런 끔찍한 재앙을 만든 겁니까?"
동행인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다가,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린 후에 말해주었다.
"우리들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