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
낫에 걸린 다리가 잔망스럽게 하늘로 솟구치고
스리슬쩍 얹어진 칼날은 눈이 못 쫒도록 살결 위를 지나니
당황한 몸짓으로 일어서보면 남은 것은 아문 흉터뿐
어찌 요사스럽지 않다 할 수 있겠느뇨. - [잊혀진 민요]에서 발췌
“이번에는 저 녀석으로 하자.”
막내는 큰형이 방만한 손짓으로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직 소년티를 말끔히 털어내지 못한 회색 눈은 뒷골목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녀석이 둘 중 누구를 가리키는......”
“저기 호랑이 무늬가 그려진 재킷을 입은 녀석.”
“......지는 알 바 아니고, 둘 다 십대잖아. 앞만 보고 달려드는 폭주기관차들. 표적으로 삼기에는 가장 안 어울리지 않나, 보통?”
뚱한 말투로 불만을 표출한 막내는 다시 눈을 돌려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 안쪽의 실랑이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갈취였다. 안경을 쓴, 한 눈에 보기에도 유약한 소년과 소년의 어깨를 왼손으로 둘러맨 불량배의 모습은 불량배의 다른 손이 소년의 목옆에 있으리라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주머니칼 같은 날붙이도 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불행에 그들이 나설 이유는 없었다. 막내는 자신의 말을 논리적으로 말했고, 첫째는 웃었다.
“핫도그를 먹을 때부터 저쪽을 신경 쓴 녀석이 어디의 누구였더라? 어디의 셋째로 알고 있는데?”
막내는 부끄러움으로 발그레해진 볼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발을 굴렸다.
“아, 진짜! 큰형! 혼자서 그렇게 정할거야? 그리고 둘째 형......”
막내의 목소리는 도중에 멈추었다. 그는 곁눈질로 벽에 등진 다른 형제를 가리켰다. 둘째는 형제들의 말다툼에도 상관 않고 두 눈을 감은 채였다.
“......도 찬성해야 할 거 아니야?”
제 딴에는 최대한의 평정심을 끌어올린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막내의 형편없는 연기력만 보여주었다, 첫째는 딱딱 굳은 막내 녀석의 목소리에 코웃음을 치고는 큰 소리 높여 말했다.
“너도 갈 거지?”
“......”
둘째는 미동도 않은 채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그 모습에 첫째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봐라, 동의했잖아.”
“어디를 어떻게 봐서!”
“자, 가자!”
막내의 항변을 무시한 채 첫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대고 있었던 2층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셋째는 질풍처럼 쏘아지는 갈색 신형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저런 사람을 형으로 두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그의 등 뒤의 사람에게 향한 것이기도 했다. 셋째는 계단의 그림자에 숨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작은 형은 안 갈 거야?”
남자는 기대었던 벽에서 몸을 떼었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하다는 듯,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셋째는 약간 고개를 젓고는 둘의 뒤를 따라 허공을 날아가듯 뛰었다. 세 신형은 도시의 건물과 아스팔트 위를 빗질하듯이 쓸어내렸다. 말 그대로였다. 그들의 발 닿는 곳 마다 돌풍이 일어나 먼지와 찢겨진 홍보지, 껌 종이를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돌풍을 동반한 채로 그들은 300여 미터의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했다. 첫째는 이제 두 십대들의 얼굴 그 모공 하나하나까지 뜯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었겠지만 첫째는 대신 호랑이 무늬 재킷 녀석의 발을 슬쩍 걸었다.
휘우우웅.
첫째가 둘을 지나치면서 생긴 바람이 골목 사이를 휘젓는다. 셋째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호랑이 재킷 녀석의 뒤로 그림자가 진 것을 알아챘다. 둘째였다. 셋째는 작은 형이 검을 뽑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등은 지나치게 절제되어있어 약간, 아니 상당히 많이 불안했다. 저 앞에서 첫째의 말이 들려왔다.
“좀 빠졌다고 그 감을 잃어버리진 않았겠지, 검사 나리?”
둘째는 그 목소리에 뽑아들었던 검을 멈추었다. 불안 어린 정적 속에 둘째는 다른 손으로 검집을 집어 들고는 재킷 녀석의 발목 위, 허공에 휘둘렀다. 칼붙이가 닿지 않았지만, 검집에서 새어나온 검기에 남자의 피부가 베이고 근육이 드러났다. 그리고 둘째가 검을 휘두른 즉시 셋째가 달려들어 상처부위에 고약을 발라 출혈을 멈추었다.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고 재킷 남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아스팔트에 코를 박은 채 쓰러졌다. 위협받던 소년도 이를 그저 행운으로만 여기고는 골목에서 달아났다. 셋째는 눈앞에서 자신들을 보지 못하고 달려가는 소년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역시나 헛수고였네, 큰형. 그러게 미리 말했잖아. 10대 녀석들은 자기 일에 바빠서 우리 일에 안 놀란다고.”
첫째는 동생의 모습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겸삼아, 지금 말과 행동이 안 맞는 거 아냐?”
“사실은 사실이니까. 겸일 형.”
“뭐, 키마이타치 일이 다 그렇지. 그러니까 이미 쓰러진 녀석 좀 빤히 쳐다보지 마라.”
셋째는 그 말에 의아해하며 쓰러진 재킷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식을 잃은 남자는 입가에서 흘러내린 침으로 바닥을 더럽혔지만, 그보다 눈에 띈 건 남자 옆에 선 둘째의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
그 손에는 아직도 검이 들려져 있었다.
긴장이 등을 타고 겸삼의 머리까지 올라왔다. 셋째는 둘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방만한 큰형과 소년티를 벗어나지 못한 동생과는 달리 청년의 모습은 진중했다. 입가에는 증오와 분노로 간 이빨도 광소에 찬 비정상적인 입고리도 보이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보았던 그 얼굴 그대로였지만, 그랬기에 막내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그 얼굴에서는 어떤 생각의 꼬리도 잡을 수 없었다. 침묵과 침변의 시간 속에 둘째는 칼을 움직였다.
탁
검집과 칼자루가 부딪히는 소리가 불안의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둘째는 형제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긴장을 풀지 못하는 셋째의 등 뒤를 힘센 손이 두드렸다.
“언제까지 석상처럼 있을 거냐. 해도 중천이니 일단 점심 먹고 하자.”
평소처럼 능청스러운 어투로 말하는 큰형이 셋째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앞서간 형제를 따라잡기 위해 뛰었다. 이미 형제가 미쳐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셋째는 억누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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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달, 5월의 포근함을 잔뜩 만끽했던 공기는 이제 슬슬 뜨거운 열기를 품고 날아다니고, 강렬한 햇살은 서성이는 사람들 발밑으로 길게 그림자를 그었다. 약간 더웠지만 나틀이하기 좋은 날씨였고, 또한 연휴였기에 도시 안에 홀로 녹음이 진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잘 정돈된 잔디밭 위에서 한 손으로는 풍선을, 다른 한 손으로는 장난감을 들고 뛰어놀고, 그들 옆의 벤치에서는 부모들이 행복에 겨워 미소 지었다. 연인들은 서로 손마디 하나하나 굳게 움켜쥐며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집도, 직업도, 처한 상황도 제각기 달랐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금 한 순간 순간의 기쁨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에 물들어버릴 풍경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이에 공감할 수 없었다. 5살이나 되었을까. 풍선을 손에 쥔 채 공터에 선 아이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감돌았다. 아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의 무리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두 눈동자는 파도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뒤쫓지만 아이가 찾는 얼굴은 없었다. 갈색 곰인형을 안은 팔이 경직되었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작은 발이 급박하게 달음질했다. 제 길도 제 목적도 모른 채 아이의 몸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흔들리는 손은 쥐었던 풍선줄을 놓쳤다. 헬륨이 가득 찬 분홍 풍선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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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키마이타치라 불리는 산의 일족이 있다. 속세의 사람들에게서 내려오는 전승은 왜곡되고 생략된 부분도 있지만, 키마이타치 일족의 행동거지 자체는 자세히 기술해 놨다. 첫 번째 키마이타치가 사람을 넘어뜨리면, 두 번째 키마이타치는 넘어진 사람을 벤다. 그리고 세 번째 키마이타치가 그 상처를 지혈해주고 간다. 참으로 요사하고 참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행위였지만, 그것은 키마이타치 일족 대대로 계승되었고, 6월달, 바닷바람이 산을 넘어 평야를 달리는 이 한 달 동안은 키마이타치의 장난질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6년을 빼놓고는. 벤치에 앉아있던 셋째는 곁눈질로 옆의 둘째를 바라보았다. 벤치는 넉넉잡아 세 명은 더 앉을 수 있었지만, 둘째, 겸이는 벤치 옆에 서있었다. 그 반듯한 모습이 그 너머로 보이는 가로등의 하단과 다를 바 없다. 홀로 앉아있는 셋째에게는 그 모습 자체로도 부담스럽다. 겸삼은 용기를 내 다시 한 번 권했다.
“겸이 형은 안 앉아? 잠잘 때 빼고는 한 번도 앉은 적이 없잖아.”
청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은 잠시 동생에게로 향하더니 감겨졌다.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셋째는 애매하게 웃고는 그 눈길을 둘째의 허리 맡으로 향했다. 다행히 검은 검집 안에 갈무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겸삼은 앞에 펼쳐진 잔디밭과 그 위에 뛰어노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들이 우리 모습을 볼 정도로 영력이 강하지 않다는 게 다행인지.’
그랬다면 사람들이 족제비 요괴들을 보고는 앞 다투어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반응은 겸이를 자극할 위험이 있었다. 사실 지금도 옆의 형제가 뛰쳐나가 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버릴 것 같아 셋째는 긴장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겸삼과는 달리 겸이는 친아버지와 삼촌에게서 체계적으로 검술을 지도받았다. 고약과 호신용으로 챙겨둔 단검으로는 죽지 않을 자신은 있어도 둘째를 막을 자신은 없다. 셋째는 최악의 가정을 상상하는 자신에게 넌더리가 났다. 그리고 그 짜증은 이 자리에 없는 첫째에게로 돌아갔다.
“아, 겸일 형은 점심 구하러 어디까지 갔기에 아직도 안 와?”
삼십 분째 돌아오지 않는 큰형을 탓하며 셋째는 고개를 벤치 모서리에 대었다. 번쩍이는 햇살을 받으며 올라가는 분홍 풍선이 보였다. 풍선은 하늘 모서리를 차지한 고층 빌딩 숲으로 사라졌다. 겸삼은 이를 보며 상념에 잠겼다.
‘불과 오십 년 전만 해도 하늘에 쓰레기가 날아다니지는 않았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는 모든 게 편했다. 검은 연기 자락을 풀풀 풀어내며 달리는 자동차도 지금보다는 적었고, 하늘에 상처를 낼 듯이 솟아오른 고층 빌딩들도 없었다. 공기는 맑았고, 사람들은 어리석지만 순박했다. 인간 노인의 넋두리처럼 상투적인 생각들뿐이었지만, 셋째는 이를 쉽사리 놓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세 형제가 모두 웃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셋째가 상념에서 깨어난 건 귓불에 불어온 뜨거운 입바람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자극에 놀란 겸삼은 재빨리 일어서려다 제 발에 스스로 걸려 넘어졌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던 첫째는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태도로 말했다.
“막내야, 지금 열연한 몸 개그를 평가하자면 빵점이다.”
“......알겠으니까 말 걸지마.”
첫째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조소어린 손짓과 함께 포장된 빵이 던져졌다. 이를 받은 셋째는 단팥빵이 아닌 것에 실망하며 몸을 일으켰다.
“또 편의점 쓰레기통에서 주워왔어?”
“말마라. 그 주변 길고양이들 텃세가 장난이 아니더라. 오늘 저녁분 밖에 못 구해왔어.”
겸삼은 큰형의 말에 동의했다. 길고양이 무리를 뚫고 음식을 쟁취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이렇게 구해왔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맞다. 겸삼은 포장지를 뜯었다. 우물거리며 씹고 있자니, 겸일의 물음이 쫑긋 솟은 귀에 박혀들었다.
“그런데 겸이는 어디 있냐?”
셋째는 놀라 빵 조각을 토했다. 바짓단에 토사물이 묻은 첫째의 경악성을 뒤로 한 채 겸삼은 일어나 방금 전만 해도 둘째가 서있었던 벤치 옆을 보았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셋째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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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사람들의 열을 헤쳐 나갔다. 홀로 떨어진 두려움에 몸은 떨림을 멈추지 않는다. 혼란이 아이의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그 탓이었을까, 아이는 발치의 돌부리를 보지 못했다. 가벼운 몸이 바닥에 넘어졌다. 손에 쥐고 있었던 곰 인형이 포물선을 그리며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아이의 두 눈동자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그럼에도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까진 무릎을 세웠다. 아이는 뿌여진 눈가를 닦으며 곰 인형을 주우러 횡단보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아이의 뒤를 갈색 그림자가 쫒았다.
등 뒤의 인기척을 느낀 아이는 뒤로 몸을 돌렸다. 흐트러지는 아이의 금발 머리칼 위로 전신에 털이 난 청년이 서있었다. 두 손에 쥔 검신은 날카로운 태양빛으로 물들어 빛났다.
그 검은 휘둘러졌다.
p.s.
요선수 얘기입니다. 예전에 게시판에서 어떤 분이 요선수 삼형제와 소녀가 만나 즐겁게 놀다 가는 이야기를 쓰신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표절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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