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노란 리본으로 묶은 소녀, 그 소녀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목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청년.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두 사람은 듀얼리스트. 카드라는 검과 듀얼디스크라는 방패를 들고 싸우는 결투자. 지금은 방패는 쓰지 않고 칼만을 테이블 위에 펼쳐두고 있지만 그 분위기만은 진짜 싸움을 떠오르게 할 만큼 진중하고 격렬했다.
방금 막 도착한 펜듈럼 목걸이를 한 소년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저 둘이 듀얼을?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리젠트 머리의 친구에게 물었다.
"곤겐자카. 세레나랑 쿠로사키, 지금 뭐하는 거야?"
"음. 유우야. 보시다시피 듀얼 중이다. 그것도 매우 진지하고 격렬한 듀얼이야. 이 사나이 곤겐자카, 심판을 보고 있지."
"갑자기 왜? 듀얼디스크도 없이. 왜 싸우는 건데?"
"그건……."
14세의 소년, 곤겐자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미간에 나이에 맞지 않는 깊은 주름이 파였다. 이걸 말해도 되나, 그런 느낌이었다.
"둘은 지금, 아이스크림 내기 중이다."
이곳은 싱크로 차원의 시티. 이 세상을 나누는 네 개의 차원 중 하나로 싱크로 소환을 주력으로 쓰는 곳. 세레나와 쿠로사키 슌, 두 사람은 융합 차원의 아카데미아가 일으킨 차원 전쟁에 맞서기 위한 조직인 랜서즈의 일원으로 싱크로 차원 사람은 아니지만 같이 싸울 동료를 모으기 위해 싱크로 차원에 온 것이다.
싱크로 차원의 강한 듀얼리스트들, 아카데미아의 침공, 시티의 치안유지국 장관 로제의 계략. 쉴 틈 없이 불어 닥치는 위기와 싸운 끝에 이들은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듀얼을 즐기는 마음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카데미아와의 결전뿐. 그러나 랜서즈의 리더인 아카바 레이지는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며칠 간 싱크로 차원에 남기로 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이곳에서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시티의 문제는 해결됐고 평의회와의 얘기를 통해 동맹도 체결되었지만, 일반 시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르지. 우선 시티의 시민들이 차원 전쟁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스탠다드와 연락하고 향후 계획을 짤 거다."
이 결정에 몇 명은 반발했고 그 중에는 쿠로사키도 있었다. 아카데미아의 침략으로 이미 엑시즈 차원은 멸망해 지금도 고통 받고 있다. 또한 아카데미아는 이번 싱크로 차원 침공은 실패했지만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고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 빨리 움직임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레이지의 결정은 단호했다.
"이건 우리 랜서즈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싱크로 차원과의 동맹은 랜서즈에 의해 이루어 졌지. 우리는 스탠다드와 싱크로, 두 차원을 잇는 연결 다리. 신뢰의 상징이다. 하지만 싱크로 차원에서 우리는 큰 타격을 받았어. 다들 많이 지쳐있지.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랜서즈가 쓰러지는 순간 싱크로 차원이 스탠다드에게 갖는 신뢰도 깨진다는 걸 알아두도록. 무엇보다 풀 컨디션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휴식도 필요한 법이지."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숨 돌릴 틈도 없는 싸움의 연속.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 조금은 쉬어도 되겠지. 그렇게 다른 멤버들은 모두 제 갈 길을 가버리고 이 둘만 남은 것이다.
"너랑 둘이 남게 될 줄은 몰랐다."
"어. 나도 이럴 줄은 몰랐군."
한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침묵이 흘렀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 랜서즈는 목적만이 일치했을 뿐 유대감이 없었다.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유우야나 곤겐자카처럼 처음부터 친구였던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서로에 대해 모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어색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쿠로사키는 원래 엑시즈 차원의 사람. 엑시즈 차원은 아카데미아에게 침략 받아 지금 끔찍한 지옥으로 변했다. 그리고 세레나는 융합 차원의, 그것도 아카데미아의 사람. 차원 전쟁에 직접 참여해 엑시즈 차원의 사람들을 해친 적은 없지만 아카데미아가 하는 짓을 숭고한 전사의 사명으로 여기고, 한 때 쿠로사키를 노렸었다. 이에 대해 세레나는 죄책감을 품고 있다.
그리고 쿠로사키는……. 솔직히 말해 세레나는 쿠로사키가 자기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로는 자신은 그의 납치된 여동생인 루리와 닮았다고 한다. 동생과 닮은 여자가 동생을 납치하고 고향을 부순 아카데미아의 사람이라니. 세레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말해야 한다.
"쿠로사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아카데미아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반드시,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사과라면 됐다."
"어?"
"너는 엑시즈 차원에 공격을 가하지 않았어. 놈들에게 속았을 뿐이야. 처음에는 놈들과 같은 짓을 하려 했을지 몰라도 진실을 알고 나서는 나를 구해줬지. 아카데미아와는 달라. 너는 믿을 수 있다. 너만이 아니라 랜서즈의 동료들을 믿을 수 있다. 사과는 다른 사람한테 해라."
난 너에게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어.
쿠로사키는 마지막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자신도 스탠다드에서 아카데미아와 똑같은 짓을 했다. 상관도 없는 이들을 카드로 만들었다. 세레나도 마찬가지. 엑시즈의 잔당, 쿠로사키를 잡기 위해 상관없는 사람을 카드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
쿠로사키는 스스로가 많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바로 며칠 전까지 증오에 사로 잡혀 있던 자신인데.
"나가자. 쿠로사키."
"뭐?"
"모처럼의 휴식이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겠지. 힘을 보충하고 전력으로 아카데미아를 쓰러뜨리는 거다."
"그게 나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모두 나가지 않았나. 우리들만 한심하게 방 안에 있을 수는 없지. 사실 나는 아카데미아 안에만 갇혀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세상을 몰라. 네가 안내해 줬으면 한다."
평범한 소녀였다면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 소녀는 다르다. 당차다. 정말로 당당하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닮았어.'
여동생을, 루리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시티의 거리는 번화한 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멋진 곳이었다. 현대적인 미를 살린 구조물과 웃음이 떠나지 않는 아이들이 보기 좋은 곳. 이 웃음은 최근에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 시티는 상류층 톱스와 하류층 커먼즈의 분쟁으로 위기를 겪었지만 지금은 화해의 물꼬가 트인 것이다. 그것은 시티의 사람들 스스로의 의지이자 랜서즈가 시티에서 노력한 결과.
우리가 이곳에 평화를 가져왔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듀얼로. 축제 분위기의 도시를 보면서도 세레나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듯 했지만 쿠로사키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떠올렸다. 전쟁에 휩쓸리기 전의 고향, 하트랜드를. 듀얼은 모두를 즐겁게 하는 최고의 쇼. 듀얼리스트는 모두의 존경을 받는 꿈의 직업. 자신도 한 때 그런 듀얼리스트를 목표로 했었는데.
전쟁이 끝나면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쿠로사키. 쿠로사키!"
"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세레나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아무 것도 아니야. 왜 그러지?"
"저기."
세레나가 가리킨 건 바로 옆에 있던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인가."
"그래. 그 중에서도 이거."
투명한 유리그릇에 과자와 초콜릿, 과일로 알록달록하게 장식된 파르페. 신 메뉴인데 시티의 킹, 이젠 전 킹이 된 잭 아틀라스가 광고하고 있었다. 시티의 화합을 기념해 30% 할인 중이라고 써져 있었다.
"맛있게 생기지 않았나?"
"그렇군."
"먹고 싶지 않나?"
먹고 싶은 건가.
"그래. 먹어보는 것도 좋겠지."
"마침 잘 됐군. 나도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당장 가게로 들어가자!"
세레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가게로 들어갔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먹고 싶다고 말하면 되지 않나. 어쨌든 따라 들어갔더니 가게 안은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점원은 물론이고 손님들까지 두 사람을 알아봤다. 시티의 듀얼 대회, 프렌드쉽 컵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인파에 밀려 밖으로 나오기 어려울 뻔했다. 세레나가 들떠서 사람들 말에 일일이 반응했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해라. 미아라도 되면 어쩔 뻔했냐."
"괜찮아. 길이나 잃을 정도로 어리지 않아. 그리고 우리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이잖아. 호응해 줘야지."
"그 녀석들 같은 말을 하는군."
쿠로사키가 말하는 그 녀석들은 랜서즈의 동료인 사카키 유우야와 사와타리 신고, 그리고 히이라기 유즈를 말한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엔터메 듀얼을 신조로 삼은 듀얼리스트들. 시티의 화합은 그 중에서도 유우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세레나도 그의 영향을 받은 건가.
점원의 배려로 야외 테라스에 앉을 수 있었다. 뜨거운 햇빛을 파라솔로 가리고 기다리는 동안 세레나는 어딘가 들떠있었다. 이런 평범한 일상을 처음으로 즐기기 때문에.
쿠로사키는 크로우를, 싱크로 차원에서 만난 친구를 떠올렸다. 그는 커먼즈 출신으로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나 자랐고, 지금은 같은 커먼즈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신과는 달리 애초에 뺏길 것이 없는 인생.
세레나도 비슷하다. 이유는 다르지만 그녀도 구속당하고 자유로운 삶을 빼앗겼다. 그랬던 세레나가 지금은 정말로 평범한 소녀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역시 닮았어.'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세레나가 물었다. 소녀 같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언가 뚝, 끊긴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러냐? 쿠로사키?"
"아니다. 아무것도."
"뭐냐. 분명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면서."
"아니라니까."
"루리를 생각하고 있었나?"
대답하지 않았다. 주문한 파르페가 나왔다. 점원이 웃으며 사인을 부탁하려다 분위기를 보고 눈치 좋게 빠졌다.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다.”
“…….”
“루리는 어떤 아이였지? 나랑 닮은 건 얼굴뿐인가? 듀얼은? 강했나? 아니면 너에게 보호받아야 할 만큼 약했나?”
“…… 너와 닮은 건 얼굴만이야. 하지만 약하지는 않았어. 동생이니까,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이니까 과보호했지만. 루리도 레지스탕스였고 믿을 수 있는 동료였어. 자기 몸 하나도 지킬 수 없을 만큼 약하지는 않아.”
“그럼 됐어. 네가 강하다고 인정할 정도라면. 저번에도 말했지만 프로페서는 어째서인지 나와 닮은 아이들을 소중히 다뤄. 절대 루리에게 심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야. 분명 무사해. 구할 수 있어.”
맞는 말이다. 붙잡혔다고 해도 루리가 놈들에게 호락호락 당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고통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기서 노닥거려도 되는 건가? 다시 그런 의문에 사로잡혔을 때 세레나가 거칠게 스푼을 집어 쿠로사키의 손에 끼워 넣었다.
“아카바 레이지가 말했지. 우린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은 휴식이다. 다음 싸움을 위한 준비 단계야. 준비가 끝나면 이번에야 말로 루리를 찾으러 가는 거다.”
먼저 먹지. 눈처럼 하얀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소스, 무지개색의 젤리를 한 번에 떠서 입 안으로 쏙. 눈이 번쩍 뜨이더니 세레나는 감탄했다. 다시 평범한 소녀의 얼굴로 돌아갔다.
쿠로사키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웃은 건가? 쿠로사키?”
“그래.”
“너, 그렇게 웃을 수도 있었군.”
당연한 말이지만 쿠로사키라고 해서 웃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미소를 지어본 건 오랜만이었다.
“좋군. 한 번 더 웃어 봐. 이번에는 포즈까지 잡고 이렇게!”
세레나는 양팔을 척, 들어올리고 뭔가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냐, 저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어딘가 익숙한데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쿠로사키. 한 번 해보라니까.”
“아이스크림 녹는다.”
“아, 그럼 안 되지.”
전쟁에서 벗어나 미소를 찾은 두 사람의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남매처럼 보였다. 쉬지 않고 재잘대는 동생과 그런 모습을 귀엽게 보며 웃어주는 오빠. 사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별 거 없었지만.
“TV에서 당구라는 걸 봤는데 배워보고 싶다.”
“나중에 가르쳐 주지.”
“진짜냐? 할 줄 아는 건가?”
“조금이지만.”
“그럼 나중에 네 몬스터에 태워줄 수도 있나? 새털라이트 캐논 팔콘이면 우주까지도 갈 수 있지?”
“우주는 위험해. 숨을 못 쉬어서 죽을 거다.”
“괜찮아. 듀얼리스트니까.”
“전혀 안 괜찮아.”
“으음……. 달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네 카드는 문라이트였지? 월광. 달을 좋아하나?”
“그래. 아카데미아에서는 그나마 하늘의 달이나 별을 보는 것 말고는 놀 거리가 없었으니까.”
“그럼 달과 별에 대해서 잘 아나?”
“아니.”
“……. 나중에 그것도 가르쳐주지.”
“너는 달이나 별에 대해서도 아는 건가? 대단하군! 혹시 요리도 할 수 있나? 이런 파르페도 만들 수 있나? 크로와상은?”
“간단한 식사 정도다. 이런 건 못 만들어. 제빵도 못한다.”
“그럼 노래는? 한 번 불러봐라!”
“거절한다.”
“뭐냐, 치사하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내빼다니. 그러고도 듀얼리스트냐!”
“이건 듀얼이랑 아무 상관없다.”
“그럼 다른 건 뭘 또 할 수 있지?”
“어릴 때 암산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데.”
“암산? 잠깐 기다려라. 그러면……. 자! 지금 보여준 카드들을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말해봐.”
“문라이트 블루 캣. 염무-천기. 월광향. 융합 징병. 융합 태그. 문라이트 블랙 십. 문라이트 퍼플 버터플라이. 문라이트 크림즌 폭스. 융합. 융합 회수. 월식. 문라이트 라인카네이션 댄스…….”
“그만, 그만. 거기까지만. 대단해. 역시 너는 굉장한 듀얼리스트로군. 그럼 이번에는…….”
“아이스크림 녹는다.”
“헛! 큰일 날 뻔했군. 그러고 보니 오늘 날씨가 꽤 더운데 그런 옷으로 괜찮은 거냐? 코트에 붉은 스카프까지.”
“이 스카프는 레지스탕스가 동료를 구별하기 위한 표식이다. 레지스탕스는 모두 몸 어딘가에 스카프를 하고 있지. 그리고 이 옷은……. 몸을 감싸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놈들에게 상처가 드러나면 안 되니까.”
“아……. 미안하다.”
“아니, 됐어. 그래. 전쟁이 끝나면 이런 옷도 벗어야겠지. 예전처럼.”
“음. 예전에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궁금하군. 그 옷이랑 라이딩 슈트 말고는 본 적이 없으니까.”
“말 그대로 평범한 옷이다. 유니클로 같은 곳에서 파는.”
“유니클로? 그것도 TV 광고로 본 적 있다. 유니클로 옷을 입은 쿠로사키. 그럼 유니쿠로사키인가! 확실히. 나는 입어본 적 없지만 그 옷은 너랑 잘 어울릴 것 같군. 반바지는 어떤가? 무릎이 드러나서 꽤 시원하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랑 비슷하겠군.”
이런 식으로, 어딘가 비상식적이지만 전쟁과는 상관없는 대화. 마음속의 응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버리고, 그 자리에는 달콤함이 남았다. 수다를 떠는 사이 그릇 위에 높이 쌓여있던 파르페는 사라졌다. 세레나는 어딘가 불만족스러운지 스푼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이 파르페. 맛은 있지만 양이 너무 적군. 둘이 나눠먹었다지만 이렇게나 빨리 없어지다니.”
“원래 디저트는 양에 비해 값이 비싼 거다. 그 만큼 만들기 힘들지.”
“하나 더 먹어야겠어.”
“어이, 잠깐. 이걸 하나 더 먹겠다는 건가?”
세레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였지만 쿠로사키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단 음식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미 하나를 먹었는데 또 하나를 먹는 건 달갑지 않았다.
“먹을 거라면 혼자 먹어라. 나는 사양이야.”
“뭐? 같이 나왔는데 같이 먹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않나. 또 도망치려고 하다니. 그러고도 듀얼리스트냐!”
“아까부터 툭하면 듀얼리스트를 논하는데, 이거랑 듀얼리스트는 전혀 상관없다.”
“아니. 진정한 듀얼리스트라면 그 어떤 상황이라도 듀얼에 임하는 것처럼 진심을 다해야하지. 그리고 레지스탕스는 절대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절대 동료를 못 본 척 하지 않지.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동료를 말리는 것도 레지스탕스의 일이다. 아이스크림은 이제 그만이다. 어차피 돈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 너 혼자서는 못 사.”
“그렇다면 듀얼로 정해야겠군.”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테이블에 손님들,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세레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듀얼디스크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쿠로사키도 듀얼디스크를 꺼냈다. 일촉즉발의 순간.
“둘 다 뭐하는 거냐!”
실로 사나이다운 목소리로 외치며 다가온 것은 곤겐자카였다.
“곤겐자카? 너는 유우야와 유즈하고 같이 간 게 아니었나?”
“잠깐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줬다. 숙소로 돌아가려다 너희들을 발견했는데, 남의 가게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동료들끼리 싸우려고 하다니. 우리들 랜서즈가 두 차원의 연결 다리라는 아카바 레이지의 말을 잊은 거냐.”
“걱정마라. 별로 큰 싸움도 아니야. 아이스크림 하나를 못 먹어서 도망치려는 이런 남자쯤은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어.”
“아이스크림?”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도망치려고 했던 주제에!”
“어이, 쿠로사키! 세레나! 둘 다 그만해라!”
다시 현재.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왔을 때는 이미 싸우기 일보직전이었어. 처음에는 아이스크림 때문이었는데 결국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버렸지. 말리는 건 무리인 것 같아서 최소한 다른 사람들에게 폐는 끼치지 않도록 듀얼디스크 없이 듀얼을 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받아들이더군. 세레나가 이기면 아이스크림을 먹고, 쿠로사키가 이기면 얌전히 숙소로 돌아가는 룰이다.”
곤겐자카의 대처는 매우 훌륭했다. 얼핏 봐도 지금 테이블 위는 사실상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마을 한복판에서 이런 듀얼을 펼쳤다면…….
“그런데 유우야. 유즈는 어디로 갔지? 같이 있던 게 아니었나?”
“아. 유즈는 지금 소라랑…….”
“배틀! 문라이트 라이오 댄서로 새털라이트 캐논 팔콘을 공격! 라이오 댄서는 한 번의 배틀 페이즈 중에 두 번 공격할 수 있지. 그리고 첫 번째 공격 후에 상대 필드 위의 몬스터를 전부 파괴한다! 이걸로 너의 필드는 비었어. 라이오 댄서로 다이렉트 어택!”
“묘지에서 함정 카드 발동! RR-레디네스! 이 카드를 묘지에서 제외하고 내 라이프를 10으로 하는 것으로 이번 턴, 내가 받는 모든 데미지를 0으로 한다!”
방금 전까지 조용하고 진중했던 싸움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는지 갑자기 격렬해졌다. 현재 필드는 세레나가 유리한 상황. 하지만 쿠로사키의 패에는.
“내 차례, 드로우! 나는 마법 카드 RUM-소울 셰이브 포스를 발동! 라이프를 절반 지불하고 묘지에서 RR 몬스터를 특수 소환! 그 몬스터를 엑시즈 소재로 랭크가 2개 높은 RR 몬스터를 엑시즈 소환한다! 새털라이트 캐논 팔콘으로 랭크 업 엑시즈 체인지! 나타나라, 랭크 10! RR-얼티미트 팔콘!”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싶을 정도의 샤우팅. 그와 별개로 듀얼은 결판이 나기 일보직전!
“얼티미트 팔콘은 오버레이 유닛을 하나 제거하는 것으로 이 턴, 상대의 효과 발동을 막고, 상대의 모든 몬스터의 공격력을 1000 포인트 내린다!”
“뭐라고?!”
“가라, 얼티미트 팔콘! 파이널 글로리어스 프라이드!”
에이스 몬스터끼리의 결투로 듀얼 종료. 리얼 솔리드비전으로 봤다면 분명 멋지겠지만 지금은 이것만한 기행이 없었다. 그래도 듀얼 자체는 훌륭했다. 승자인 쿠로사키의 남은 라이프는 5. 세레나는 분한 것 같지만 정말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듀얼이었다. 그리고 금방 회복했는지 일어나서 쿠로사키에게 악수를 청했다.
“좋은 듀얼이었다. 무시한 건 사과하지.”
“그래. 너도 대단했다.”
감동의 결말. 유우야와 곤겐자카도, 지켜보던 사람들도 흐뭇하게 웃으면서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 아이스크림을 못 먹어서 아쉬웠는지 세레나는 어딘가 씁쓸한 표정을 짓다 그제야 유우야를 발견했다.
“유우야? 언제부터 있던 거냐?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아니야. 둘 다 좋은 듀얼이었어. 굉장했어, 세레나. 쿠로사키도.”
“그러고 보니 유즈랑 같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응. 유즈는 지금 소라랑 있어. 사실 우리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데 아마 세레나 너도 좋아할 거야.”
“내가?”
그 때, 유우야 일행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손에 커다란 짐들을 들고 오는 소년과 소녀. 히이라기 유즈와 시운인 소라였다.
“유즈! 소라!”
유우야와 곤겐자카는 얼른 달려가 두 사람의 짐을 받았다.
“소라, 이 짐은 대체 뭐냐?”
“아. 곤쨩은 모르는구나. 유우야랑 유즈가 싱크로 차원에서의 승리와 우리 모두 모인 기념으로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거든. 나는 우연히 지나가다 듣고서 준비를 도와주기로 했어.”
“소라. 이건 서프라이즈 파티라니까.”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여기 모두 모여 있었잖아. 그보다 유우야. 파티에 쓸 아이스크림은 아직 안 샀어?”
“뭣?”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에 세레나와 쿠로사키는 반응했다. 설마.
“이제 사야지. 마침 세레나도 먹고 싶다고 했어. 바로 사서 가자.”
“나는 초코 아이스크림!”
“이미 초콜릿 과자는 많이 샀잖아.”
“그런데 파티하려면 모두 불러야 하잖아. 레이지랑 레이라는?”
“같이 있겠지. 츠키카게한테 연락하면 알 거야.”
“사와타리는?”
“아까 보니까 공원에서 ‘내가 바로 프렌드쉽 컵의 주역 사와타리 신고다!’ 하면서 사람들한테 사인해주고 신났던데.”
“크로우랑 신지, 애들도 부를까? 토쿠마츠 씨는?”
“그들도 모두 함께 싸운 듀얼리스트. 이 사나이 곤겐자카. 당연히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부르자!”
“일단 준비부터 끝내자. 유우야, 얼른 아이스크림 사와.”
“나도 같이 가지, 유우야!”
다들 벌써부터 파티 분위기에 왁자지껄 했다. 세레나까지 유우야를 따라 가버리고 혼자 떨어져 있는 쿠로사키.
지금 그의 눈은 유즈를 보고 있었다. 히이라기 유즈, 그녀도 동생인 루리와 닮은 아이. 차원을 떠돌면서 루리를 찾아다녔지만 닮은 사람을 만났을 뿐 루리는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씁쓸한 생각이 드는 그 때,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늘색 머리 소년이 사탕을 들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할 말이 있는데…….”
시운인 소라. 이렇게 보면 그저 귀여운 어린 아이 같지만 그도 사실 아카데미아의 엘리트 전사. 한 때 쿠로사키와 싸웠고 서로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 지금은 그도 세레나처럼 아카데미아를 배신했지만 쿠로사키와는 미묘한 관계였다.
그런데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그가 사탕을 내민다는 것은.
‘사과의 뜻인가.’
쿠로사키는 사탕을 받았다. 손이 살짝 닿자 소라는 움찔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은 것처럼 딴 곳만 보고 있자 쿠로사키가 먼저 말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 너를 100% 신뢰하지 않아. 하지만 듀얼리스트로서의 너는 인정한다. 너의 강함, 집념은 인정할 수 있어. 등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소라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너도 파티 준비 도와야 돼!”
다시 천진난만하게 일행에 어울렸다. 세레나가 지어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표정도 평범한 어린 아이 같았다.
다음에 쿠로사키의 시선은 유우야에게 향했다. 유즈와 세레나가 루리를 닮았다면 유우야는 유토를, 엑시즈 차원에서 함께 왔지만 사라져버린 친구를 닮았다. 유우야의 모습에 친구를 겹쳐본 순간.
이게 유우야의 듀얼, 미소의 힘이야. 슌.
“유토?”
환청처럼 목소리가 스쳐갔다. 아니, 단순한 환청이 아니다. 분명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역시 유토는 유우야의 안에……. 유토는 유우야를 믿고 있다. 지금 모두가 잠시나마 싸움을 잊고 웃을 수 있는 건 모두 유우야의 덕분. 쿠로사키가 잊고 있던 모두를 미소 짓게 하는 듀얼로 유우야는 시티와 융합 차원의 듀얼리스트들을 바꿔났다.
그렇다면 나도 믿을 수 있다. 그의 듀얼이 잠깐의 평화를 영원으로 바꿀 수 있다고.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막대 사탕의 포장을 뜯어 입에 물었다. 그 때, 세레나가 쿠로사키를 불렀다.
“쿠로사키! 너도 빨리 와라!”
떠들썩한 그들의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하늘을 한 마리 새가 자유로이 날았다.
이 글은 매우 운명처럼 만들어졌습니다. 평소처럼 트위터를 돌아다니다가 매우 좋은 소재를 발견했어요. 보는 순간 팟, 하고 생각이 파바박! 전개되면서 처음 중간 끝이 순식간에 만들어졌죠. 바로 휴대폰으로 쓰기 시작하다가 루리웹에 들어왔더니 아니, 이럴수가. 마침 2주년 기념 팬픽 대회 공지가 올라왔지 뭡니까? 이것은 운명이라 여기고, 원래 좀 가볍게 쓰려던 노선을 수정해서 2주년에 맞는 인생작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스타트 라인을 남들보다 훨씬 유리하게 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은 벌써 됐지만 몇 번이나 퇴고를 하고, 수정을 하다가 오늘에서야 "그래.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올리게 됐습니다. 이랬는데 수정할 거리가 발견되지만 않았으면 하네요. (웃음)
원래 제목은 그냥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세레나랑 츠키카게랑','세레나랑 슌이랑' 이라는 짤막한 글을 쓰면서 제목을 지금처럼 바꾸게 됐습니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죠. 여러분이 재밌게 읽어주시고 댓글과 추천으로 답해주신다면 더더욱 운명적으로 느껴지리게 될... (사심)
뭐, 농담이지만 농담이 아닙니다. 2주년 이벤트 덕에 좋은 경험을 했어요. 그리고 트위터로 우연찮게 소재를 제공해주신 팔로워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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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의 슌슌한 미소를 떠올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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