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날이다. 하늘을 보자. 구름이 한점도 없는 대신 연무가 하늘을 조금 흐릿하게 뒤덮은 저녁이다. 황혼이 겨우 끝난 시간의 어두운 푸른 색이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게 보여진다는 것이 그를 증명한다. 그믐달이 연무 사이로 지상을 로맨틱하게 비춰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신월로 추정되는 날이기에 불가능해 보인다. 별은 아예 보이지조차 않는다. 지상의 빛이 너무 밝은 탓이라고 이유를 대면 충분할 것이다. 대체 무엇이 나의 온 신경을 이 곳으로 끌어모은 것인가.
「한번 성립된 이상향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는가.」
다양한 소리들과 소음들 사이로 흥미를 끌어오는 한 소녀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지상으로 눈을 돌리자. 지상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눈은 안개 사이로 비치는 조명들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직선적이거나, 곡선적이거나, 혹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구조물들이 높이 솟아올라 도심을 이루고 있는 광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소리는 그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도심이라고 하기에 조금 외진 곳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들려온 말소리였다.
「그런 주제였었지, 아마.」
「성립이 불가능한 것은 유지도 불가능해. 그 사람들은 왜 쓸데없는 토론을 한 걸까.」
이쪽은 아예 이상향의 존재가 불가능하다 못박아버린 모양이다. 반대쪽에 앉아 있을 법한 두번째 소녀의 차분하지만, 냉정하기도 한 목소리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았다. 물
장소를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2층의 약간 푸른 빛을 띈 유리가 씌워져 있는 테라스, 더 정확히는 오른쪽 구석에서 세번째에 위치한 테이블이다. 내부 인테리어는 자연에 목이라도 마른 자가 디자인하기라도 한 건지 식물을 모방한 오브제들이 난잡할 정도로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다.
첫번째의 목소리는 두번째의 목소리가 한 말에 약간은 다른 생각을 지닌 모양이다. 적포도주가 1/4 정도 채워진 유리잔을 흔들며, 「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어. 어느 곳에는 이상향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단 말이야.」라 말했다. 그리고 그 뒤 짧은 간격을 두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꼬리를 흐리는 것으로 보아, 반대쪽에서는 말 없이 부정의 몸짓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시선을 창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아마 대학생쯤 되었을 것이다. 갈색의 단발머리는 한쪽 옆을 리본으로 묶었고, 머리색과 비슷한 갈색의 눈동자는 자신 앞의 소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검은 색의 케이프 밑으로 나와 있는 흰 셔츠의 소매 끝, 즉 소녀의 양 손에는 각각 포크와 나이프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그 앞의 테이블에는 스테이크와 구운 감자, 그리고 찐 아스파라거스가 올려진 접시와, 적포도주가 반쯤 담겨 있는 유리잔이 놓여져 있다. 스테이크의 단면은 겉면 정도를 빼면 완벽한 붉은색이다.
마지막 말소리가 끝났을 시점부터 1분 26초에 가까운 1분 25초가 지났을 무렵, 갈색 머리의 소녀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짧은 단어로 시작점을 정했다고 하면 될 것이다. 「다른 우주라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이쪽에서는 다중우주의 존재를 밝히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다. 진척도를 알지는 못하고 알기도 귀찮으니 더이상의 자세한 확인은 해줄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반대쪽의 소녀는 그것조차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다중우주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스테이크를 작게 한조각 잘라내는 소녀의 반대쪽으로 눈을 돌리자. 약간은 푸른색을 띈 보라색 드레스의, 그리고 곱슬대는 금단발의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녀의 눈은… 보라색이다. 인공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눈동자. 다들 알다시피, 저렇게 채도 높은 보라색의 자연산 눈동자를 현실에서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청자색(靑紫色)이나, 혹은 알비노들의 연회색에 가까운 연보랏빛의 눈조차 현실성이 극히 떨어지지 않는가.
보라색은 상당히 그 예시로 보라색은 고귀함의 상징이기도, 신비함의 상징이기도, 화려함의 상징이기도 한 색이다. 그리고 고독을, 상처를,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 보라색은 붉은색과 푸른색이라는 보색은 아니지만 극도로 상반된 의미를 가진 두 색을 합친 색이다. 즉, 양면을 지닌 색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 주절주절 늘어놓은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양해를 부탁하며, 짧은 결론으로 넘어가겠다. 인간, 특히 살아있는 일반적인 인간에게는 보라색이 그렇게까지 어울리는 색이 아니다. 전술했던 의미로던지, 혹은 다른 것으로던지 무엇인가 특별한 뒷받침이나 이면이 존재하는 인간이어야 그 보라색이 어울릴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궤변에 따르자면 저 금발자안의 소녀의 이면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해야 할 것이다.
보라색이 어쨌느니 저쨌느니따위는 집어치우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금발 소녀의 앞에는 레몬 조각과 생선 휠레, 그리고 브로콜리 등등의 채소가 올려진 접시가 있다. 그리고, 당연히, 백포도주. 양쪽 다 꽤나 부유해 보이는 모습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점차 이름을 말해준다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 하, 설명하는 것을 까먹었는데, 내 눈길이 끌린 처음부터 양쪽 다 음식이 '남아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적고 작은 조각들만이 접시에 남겨져 있는 상황이었다. 간단히 말해, 몇분 정도 흐므면 '끝났다'라고 또 설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불러오는 듯, 갈색 머리의 소녀는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잠시라고 할 수 있을, 설명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일들이 지나간 후였다. 유일하게 설명할 가치가 있는 일은 갈색머리의 소녀가 모자걸이에서 약간은 오래되어 보이는 하얀색 리본으로 장식된 검은색 실크햇을 꺼내 쓴 것 뿐이다. 두 소녀는 거리로 걸어나와 그들의 오른쪽으로 향했다.
분명 내가 처음에 이 밤하늘이 연무로 뒤덮여 있다라 말한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공광들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연무의 사이사이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빛을 흘려보내고 있다. 깊은 기억에 파묻힌 오래된 추억도 능히 다시 캐낼 만큼이나 몽환적인 어두움이라 하면 적당할 것이라. '안개여, 안개여. 내 손에 들려 목숨을 부지하는 전등으로 하여금 나의 증오스런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너였구나.'
… 나는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버렸단 말인가.
13분 58초 후, 두 사람은 길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헤어지려 하는 모습이었다. 갈색 머리 소녀의 사이에는 역, 건물들 사이로 모습을 보이는 역이 있었다.
마주보고 선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금발 소녀가 작별인사를 먼저 했다. 「내일은 세이호코 언덕으로 가기로 했지, 렌코? 이번에는 제발 늦지 마.」
렌코라… 아쉽지만 역시 성까지 불러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을 계속 보다 보면 재미있는 일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렌코라 해야 할 갈색 머리의 소녀는 머리를 긁적이며-아무리 봐도 모자를 긁은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그에 답했다. 「걱정하지 마. 이번에도 늦으면 여행비는 내가 다 지불해줄 테니까.」
렌코의 손을 흔드는 동작을 신호로, 두 사람은 헤어져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렌코는 역 안으로 들어갔고, 아직 이름을 듣지 못한 금발 소녀는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한마디의 말로 이 첫번째 시청을 끝내기 전에 나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 빼고는 그 어떤 행동도 가능하지 않은 인간과 같다. 아니, 미물이라 비하하는 것조차 과분할 정도인 상태다. 그러니 나를 그저 쓸데없는 소리만 해 대는 화자 정도로 받아들여주길 바라며, 이만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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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 그득한 수상쩍은 글을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