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리캉을 쥔 뒤로 아까까지의 손의 허전함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이유 모를 고양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 걸까? 마치, 무언가를 위한 계시 같기도 했다. 부르르르르. 들고 있는 바리캉이 내 요력에 사정없이 떨고 있었다. 일부로 요력을 불어넣은 것도 아닌데 제멋대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무의식중으로 요력을 불어넣고 있는 거겠지. 두, 세 발 앞서 가던 유카리님이 문득, 뒤를 돌아보고는 물었다. 「응? 왠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란은 못 느꼈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목적지까지 그리 멀지 않지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드니 서둘러 가도록 하자.」 「네.」 유카리님이 불길하다 말씀하셨다. 분명, 내가 무의식중으로 흘리는 요력을 느끼신 거겠지. 이러면 안 되는데‥. 맞아, 이 바리캉이 원인 같으니 손에서 놓으면 될 거야. 그래, 아무 대나 갖다버리자! 나는 대충 주변을 둘려보다 들고 있던 바리캉을 적당한 곳에 던져두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니 쉽사리 버리기 어려웠다. 내안의 또 다른 내가 방해를 하고 있는 건지 버린다는 선택지를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제약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버리는 행동 자체를 못하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도대체 왜? 이 바리캉을 버린다는 행동만큼은 취하지 못하는 걸까? 뜻하지 않은 난관에 고민을 하게 된 나는 앞서가던 유카리님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고 말았다. 순간 당황한 나는 주변을 둘려보며 유카리님의 모습을 찾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날아 오르셨는지, 허공에 점이 되어있는 유카리님이 보였다. 이대로 주저하고 있다간 완전히 놓쳐버리게 돼. 다급해진 나는 땅을 박차고 재빨리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고도를 높여 갈수록 정신은 아찔해져 왔지만, 지금은 고소공포증에 굴복해 있을 때가 아니다. 어제 처럼 또 다시 조난하게 된다면 그땐 정말로 면목이 없어진다. 나는 이를 악물고, 유카리님의 뒤를 전력으로 뒤 쫒았다. 세찬 바람에 얼굴 가죽이 뒤로 밀리는 것을 느끼며 유카리님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다행히도 유카리님은 전력으로 날고 있지 않았서인지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는 유카리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 했다. 길 안내 받을 때만큼은 딴 생각 하지 말자. 이 바리캉에 대한 것은 나중에 고민해도 될 일이다. 그렇게 이 정체모를 바리캉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된 나는 얼마안가 유카리님과 함께 결계 보수를 위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 「란, 여기 불안정해져 있는 결계가 보이니?」 울창한 나무사이로 천천히 걷던 유카리님이 돌연 내게 물었다. 도착한 곳은 어제 조난을 당했던 숲속과 비슷한 장소였다. 온통 새소리와 벌래소리로 시끄러운 후지산 인근의 대수해를 방불케 하는 대자연. 나는 유카리님의 물음에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어있는 건지, 그 주변을 둘려보며 온 신경을 눈에다 집중했다. 「그렇게 눈으로만 찾으려 하면 안 돼.」 유카리님이 손을 들고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눈이 아니라 감각에 집중해보렴.」 그 말씀대로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해서 전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그때, 귀로는 들리지 않지만, 감각으로 느껴지는 이질적인 노이즈가 전해져왔다. 방향은 유카리님이 가리키고 있는 쪽이었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한 번 감각을 집중시키자 노이즈의 느낌이 한층 더 강하게 전해져온다. 나는 그곳을 향해 한발 한발 조심스레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부근이 틀림없어! 노이즈의 근원을 특정해낸 나는 그제야 노이즈의 정체를 정확히 꿰뚫어보게 되었다. 노이즈는 조각이 몇 개 인가 빠진 퍼즐처럼,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 거리고 있는 결계층이었다. 한 번 자각을 하고나니 눈으로도 확실히 보여 왔다. 「유카리님, 이게 바로 보수해야 할 결계인가 보군요.」 「그래. 이제 그걸 어떻게 보수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 보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로선 무리입니다. 행여나 잘못 되기라도 하면….」 「괜찮아, 만에 하나 잘못 되더라도, 내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까.」 만에 하나 사고를 치게 되더라도 나대신 책임을 지신다는 말씀이었다. 유카리님이 보장하겠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는 해보는 수밖에 없지. 나는 입을 벌리고 대자연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어냈다. 좋아, 이걸로 긴장도 풀렸겠다. 나를 믿는 나를 믿는 거야! 깨어져 삐걱거리고 있는 결계를 향해 한 손을 쭉 내밀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손바닥 끝에 요력을 집중하자 '파지직' 스파크가 튀면서 손바닥과 결계를 잇는 푸른빛의 전류가 생겨났다. 결계가 가진 정보가 전류를 타고 내 뇌 속으로 흘려 들어온다. 어디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아귀가 맞지 않게 된 건지, 뇌 속으로 흘러든 정보들이 알려주고 있었다. 머리는 흘려드는 정보로 복잡해져 갔다. 이제 원인에 대해서는 어느만큼 알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는 복구시킬 수 없다. 문제는 어떻게 복구 시키는가하는 방법이었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관념들이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돈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잊혔던 기억의 단편들이 마구 뒤섞여서 떠돌아다니는 듯 했다. 과도한 정보 처리로 인해 몸의 혈액들이 머리 쪽으로 급속하게 몰려들었다. 그 탓에 심한 두통이 일면서 머리 전체가 지끈 거린다. 계속 시간을 끌었다가는 머리가 펑-하고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수많은 기억의 단편들을 엿보며 복구를 위한 방도를 찾는다. 그 중에는 예전의 기억으로 보이는 것들이 몇몇 엿보였다. 그것은 란이 아직 어렸을 적, 꼬리가 이제 막 두 세 개 정도 밖에 안 되었을 적의 기억들이었다. 그 기억속에서의 유카리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다정한 분으로, 란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마다, 그 어린 고사리 손을 잡아주며 따스한 위로의 말로 보듬어주고 계셨다. 천애고아와 같은 란에게 부모 이상의 존재가 되어주며 그녀의 의지할 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때의 유카리님은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곧 알게 되었다. 나는 저것이 마치 내 본인의 기억인양 그 시절의 유카리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감상에 젖으면 안 돼!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다시 여러 기억이 혼재해 있는 심상의 바다를 헤쳐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인슈타인도 울고 갈 기하학 덩어리 속에서 간절히 바랐던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보수를 위한 실마리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결계의 공식. 나는 그것을 토대로 비틀려있는 결계를 고쳐나갔다. 마치, 프로그램의 버그를 수정해나가는 프로그래머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결계란 것도 주술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의 일종이구나. 결계 보수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인을 찾고 해결 방법만 알면 손쉽게 끝낼 일이었다. 정말, 프로그램이랑 똑같아. 마무리 끝손질을 마친 나는 매우 보람찬 얼굴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훔쳤다. 유카리님 말씀대로 정말, 하다보면 되긴 되는구나. 거기다 이전의 나로서는 상상 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수학 공식이나 기하학에 대해서도 통달하게 된 건 덤. 으하하하. 수학 천재 란님이 바로 이 몸이시다! 괜스레 우쭐해 져서는 어깨가 뒤로 젖혀진다. 오늘 부터 난 수학 귀신 란이다! 「뭐하는 거니? 보수를 끝마쳤다 싶더니, 뜬금없이 가슴이라도 자랑하고 싶은 거야?」 등 뒤로 부터 유카리님의 눈총이 쏟아진다. 이건, 뭐랄까? 이 두덩이 훌륭한 가슴을 자랑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제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져서 그만…….」 내뱉고 보니 꽤나 이상한 변명이 되고 말았다. 너무 우쭐대고 있었나보다. 나를 보는 유카리님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유카리님은 눈을 반쪽으로 만들고는 심술 난 표정 지었다. 「그래, 나 보다 조금 더 큰 거 가지고 참 자랑이야.」 혹, 나에게 질투라도 하고 계시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걸로 봐서 삐친 듯 보였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오해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 강력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처음 하는 결계 보수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 때문에 잠시, 자만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흥, 기억을 잃었다곤 하나 매일 하던 일이었으면서.」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결계 보수는 성공적이었지만. 역시, 너무 우쭐댔었구나. 조금 침울해질 것만 같다. 그런 내 심정을 잃었는지, 유카리님이 눈을 반호로 만들고 이죽거리는 투로 말했다. 「설마, 자신이 대단해서 해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게…….」 「어머어머, 란도 참. 머릿속에 수학공식이 떠오르고 하니까 본인이 천재가 아닐까 싶었던 거구나!」 젠장, 분하지만, 반박 할 수 없었다. 그 말대로 나는 좀 건방졌습니다. 내 자신이 천재 같고, 대단하다 느꼈습니다. 진심으로…. 「아하핫, 식에 짜둔 내 술식 때문인 것도 모르고 말이야!」 틀렸어. 이미 난 유카리님의 페이스에 완벽하게 말려들고 말았다. 그런데 술식 때문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수학 귀신이 된 게 똑똑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거 때문이라고? 내가 식이라서 가능했던 것일 뿐이었단 말이야!? 아까보다 더 침울해진다. 더불어서 창피함도 추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바보짓을 한 것과 별개로 지금 유카님의 놀림은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 란이 어릴 적의 유카리님은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키득거리고 있는 지금의 유카리님에게선 현자로서의 위엄이나 품위는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저 모습이야 말로 유카리님의 민낯일지도. 「너 요즘 날 너무 웃기는 구나. 가메하메하에 이어 자뻑이라니!」 너무 웃은 나머지 배에 복통이라도 일었는지, 이젠 배를 붙잡고 비웃는다. 바로 그때, 내 귓가에 '나를 써라!'라고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소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내 자신이 만들어낸 환청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손에 꽉 쥐고 있는 이 은색의 바리캉이 내게 그리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야, 아직 이것을 휘두르기엔 일러.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켜가며 유카리님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그만 놀리셨으면 합니다.」 일종의 경고였다. 하지만, 유카리님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비아냥으로 맞받아쳤다. 「왜에~, 구미호 발톱 강화라도 하게?」 이로서 나의 마음은 정해졌다. 좋아, 이 바리캉 마음껏 휘둘려 주마! 내 요력에 반응하고 있는 은색의 바리캉을 나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유카리님을 향해 휘둘렸다. 그것은 최적의 경로를 따라 군더더기 없이 그어지는 기습적인 호. 그러나 아쉽게도 어디선가 꺼내든 쥘부채에 막혀 부질없이 허공만 가르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하극상에 유카리님은 적잖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직, 교육이 덜 된 모양이네.」 「저는 분명히, 그만 놀리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이게 다 결계 복구 작업을 하면서 엿본 란의 기억 때문 일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하극상, 반드시 성공시키고 말테다. |
|
---------------------
하극상의 성공은 곧 유카리가 삭발됨을 의미함.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