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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저씨들……, 그만 머리를 들라고 했는데도 쉬이 들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이러면 내 쪽이 곤란한데. ─ 예전의 란님은 조금 무섭다는 인상이었거든요. 리글의 그 말이 뇌 내에서 자동재생 되었다. 그런 의미였구나. 이곳의 란은 정말로 무서웠단 말이지. 「저는 이제 신경 쓰지 않으니……」 「정말이십니까?」 「네.」 내 허락에 간신히 고개를 든 남자는 기쁨과 안도감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누명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무고한 사람이 무죄 확정을 받아 구사일생이라도 한 줄 알겠다. 두 남자는 꿇었던 무릎을 세우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적응 안 돼. 나는 딱히 갑질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이런 대접, 그다지 달갑지 않단 말이야. 남자는 아이의 손을 잡아채고는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말썽을 일으킨 아이에게 무어라 꾸짖는 것이 보였다. 「하마터면 너랑 나, 빡빡이가 될 뻔 했다!」 뭐라 말하는지 귀를 쫑긋 세워보니 저런 말이 들렸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라면 란이란 구미호는 심기를 거슬리게 한 자를 강제로 삭발시키는 짓을 하나 보다. 뭐랄까. 참 악취미이면서도 엉뚱하다. 대체 왜 하필 삭발이래? 이해가 안가네. 점차 이 몸뚱어리의 원 주인이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지에 대해 대충 윤곽이 잡혀가는 듯 했다. 정리해보자면 남자에겐 음흉한, 여자에겐 적대의 시선을 받는 무섭고 엉뚱한 여자. 뭐야, 이 조합. 더 더욱 알 수 없게 되었어. * 큰 길을 따라 쭉 걸어 올라가자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수가 급속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입구에다 나무로 된 입간판을 세워두고 있는 식당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곧 물품을 사고 파는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행인이 많이 보인다는 것은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라는 증거. 음식점이나 상점들이 많이 보이는 건 여기가 곧 상점가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정육점이나 채소를 파는 곳만 찾으면 오늘 장보기 끝이구나. 아니야, 돌아가는 문제가 남았구나. 그건 나중에 생각 해야지. 이젠 익숙해져버린 행인들의 시선을 견디며, 조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자 예상대로 채소를 파는 가계가 나의 시야에 곧장 포착되었다. 한 눈에 봐도 싱싱해 보이는 채소들이 진열대 위를 한가득 채우고 있다. 방금 수확해 온 것처럼 싱그러웠다. 채소들은 각각 종류별로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으며, 나는 그 중 감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감자 특유의 냄새가 강하게 풍겨져 오는 것이 이것은 특상품이 틀림없다. 「하나 얼마 합니까?」 나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계 주인에게 집어든 감자 가격을 물어보았다. 가계 주인이 입을 연다. 「하나 3엔입니다. 열 개에 25엔.」 우와 싸. 정말 싸다. 이 동네 물가가 정말로 저렴하구나. 가계 주인은 푸근한 인상답게 합리적인 가격을 요구해왔다. 감자 하나가 3엔이면 옆에 있는 양파는? 「10개 14엔입니다.」 내 시선을 읽고서 바로 가격을 알려주는 주인아저씨. 여기 물가가 어떻다는 건 대충 알겠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집에서 가져온 화폐를 꺼내들었다. 화폐의 앞면엔 어디서 본 것 같은 여성이 그려져 있었고, 그 옆으로 100엔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윽, 여기 물가에 비해 너무 큰돈이야. 나는 그 수상쩍은 디자인의 지폐를 다시 주머니 안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주머니 속을 뒤적거려 다른 지폐를 꺼내 들었다. 이 지폐 역시, 조금 수상해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달고 있는 소녀가 그려져 있는 화폐. 10엔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감자 열 개와 양파 열 개 사겠습니다.」 나는 같은 모양의 지폐를 네 개를 꺼내 가계 주인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가계 주인은 돈을 받을 생각은 안하고 퉁명스런 시선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설마, 내가 내민 지폐가 위조된 거라든지, 아니면 이 동네에선 통용되지 않는 가짜 지폐라도 되는 걸까? 이런 젠장, 어쩐지 디자인부터가 이상하다 싶었어! 만화에나 나올법한 리본을 달고 있는 소녀라 던지 유카리를 닮은 여자라 던지…. 유카리를 닮아? 그러고 보니 처음 꺼냈던 지폐에 그려져 있던 여성의 특징이 유카리님과 완전 빼다 박았다. 머리에 쓴 나이트캡이라던가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앞섬이라던지, 장갑이라던가. 혹시나 싶어 다른 액수의 지폐를 꺼내보았다. 50엔이라 적혀진 지폐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모자를 쓴 여성이 그려져 있었고, 5엔이라 적혀진 지폐에는 첸과 같은 고양이 귀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 지폐는 그거구나. 그 여자-유카리님-가 재미로 만든 웃기지도 않는 가짜 화폐인 게 틀림없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어쩐지 속에서 부터 기묘한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순전히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본 내 탓이지만, 모든 잘못을 유카리님에게 뒤집어씌우고 싶은 열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금 가지고 있는 화폐라곤 이 엉터리 지폐뿐인데 어쩌지? 이렇게 삽질을 하고 마는 건가…. 좌절감에 양 어깨가 축 쳐져가는 나에게 가계 주인이 의아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실례된 말씀이지만, 혹시 장바구니를 두고 오신 건?」 엉터리 지폐를 지적해 올 줄 알았는데, 정작 지적해 온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장바구니? 「…… 그‥ 비닐에 담아 주진 않는 건가요?」 「비닐이라니요?」 「……….」 여기가 꽤 옛날 풍경이란 걸 알았을 때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음… 당연히 비닐 봉투 같은 게 존재할리 없겠지. 여긴 완전 옛날 정취가 그대로이니까. 이것도 나의 무지가 가져온 실수야. ─ 모르는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렴. 유카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생리적 거부감 때문에 무시해버린 것이 결국,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싫더라도 물어봤어야 했어. 추궁당하는 것을 감수 했어야 했어. 근데 지금 후회해봤자 뭔 소용이야. 머리가 가열되어간다. 후─. 숨을 길게 뱉어내며 조급해진 감정을 침착히 가라앉히기로 했다. 아직, 방법은 있다. 현재 내 수중에는 상당한 거금(여기 기준으로)이 있고, 여기는 뭐든지 팔고 있는 상점가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단 하나. 여기서 장바구니를 사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유카리님이 장난삼아 만든 것 같은 지폐를 내보이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가진 이 지폐, 쓸 수 있는 거 맞나요?」 「네… 네?」 가계 주인이 당황해하면서 되묻는다. 그리고 이내 크게 뜨여진 두 눈으로 몇 차례 끔뻑 거리면서 알았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네. 환상향에선 전부 그 화폐를 씁니다.」 이 바보 같은 지폐가? 정말로!? 조금 미심쩍긴 하지만, 믿는 수밖에 없지. 이걸로 화폐 문제는 해결이네. 그런데 나를 보는 가계 주인의 시선이 어째 좀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 수상하다는 눈빛이었다. 가계 주인이 이상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란님,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그러게요. 하하… 제가 오늘 정신머리가 없습니다.」 「마치, 바깥세계에서 온 사람 같은 반응이어서…… 아, 죄송합니다. 방금 한 말 잊어 주십시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그야 그렇겠지. 내용물은 완전 다른 사람이니까. 나는 조금 쓴 웃음을 지어보이며 적당히 둘러댔다. 그런데 바깥세계는 또 뭐야? 바깥세계가 있다는 건 여기가 안쪽 세계다 이건가? 「죄송한데, 이 주변에 장바구니를 구할 만 한 데가 어딘지 알려 주셨으면 하네요.」 바깥세계에서 온 사람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모르는 게 있다면 무조건 물어보자. 수상하게 보이더라도 간첩 취급이야 당하겠어? * 무사히 장바구니를 구입한 나는 채소가계에 들리기에 앞서 식당부터 찾았다. 점심시간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아침밥을 거른 것이 극심한 공복을 불려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뭐, 겸사겸사 더위도 피할 겸. 이렇게 더운 날에는 소바를 먹는 게 좋은 선택이겠지. 근처에 보이는 소바 가계에 들어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는다. 가계 내부는 온통 나무판자로만 이루어져 있어 나름 옛스러운 정취를 풍겼다. 요즘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오래된 장인의 가계라는 느낌이랄까. 디지털 세대에게는 무척이나 낮선 풍경일 것이다. 이런 옛스런 가계에 어울리지 않게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종업원이 달려와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해왔다. 「어서 오십시요, 란님.」 「어… 아응.」 손님이 아니라 란님이라니. 란은 완전 유명인이구나. 아니, 유명한 게 당연한가? 나는 주머니 속을 뒤져 지폐를 몇 장 꺼내, 그 중에 나와 비슷해 보이는 그림을 찾았다. 이거 봐. 통화 수단에다 떡 하니, 그려져 있는 정도면 이 란은 얼마나 유명인사인 거야? 그리고 대체 어느 정도의 거물인 거야. 그 유카리님이란 여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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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삭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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