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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으로 출렁이는 단발에 백옥같은 피부. 청아하게 빛나는 호박색의 눈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 같다. 그런 신비한 분위기의 미녀가 바로 나의 하나 뿐인 친구, 란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란과 친구가 된 경위를 떠올릴 수 없다. 내가 기억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죽마고우 정도로 오래된 친구 사이 일수도 있고, 아니면 불과 몇 년 전에 알고 지낸 사이 일수도 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부분의 기억이 애매하다. 마치, 희뿌연 안개와 같이 장막이라도 쳐져 있는 것 같다. 란은 동갑내기로 학교내에서 상당한 유명인이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이국적 분위기, 그러면서도 활기찬 성격. 거기다 가슴까지 크다. 인기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팬클럽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올 정도로 학우들, 특히 남자애들에게 절대적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다보니 옆 학교에서 까지 남학생이 찾아올 정도고 심지어 대학생 오빠들 까지 얼굴을 보기위해 찾아온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곤 고백 받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 이유는… 어쩐지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라나 뭐라나? 나로서는 당최 이해 할 수 없는 이유다. 왜냐면, 란은 내가 아는 학우들 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성격이니까. 그리고 나만이 아는 사실인데. 내 친구 란은 괴짜다. 그것도 상당히. 오늘도 귀과중인 내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붙어있다. 란의 호박색 눈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 얼굴에 뭐 붙은 게 있어?」 부끄러워 한 말에 란은 싱긋이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야~.」 별 일 아니라고 둘러댔다. 저렇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는 것은 장난이라도 칠 꿍꿍이 속이겠지. 「이상한 짓 할 생각 말어.」 「헤헷. 들켰다.」 혀를 샐쭉 내밀고 능청스럽게 미소 짓는 란. 그 얼굴이 뭐랄까. 몹시도 사랑스럽다. 아‥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당장 고백을 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이런 귀여운 애가 내 친구예요!' 무심코 외칠 뻔 했다. 하지만, 속지말자. 겉으론 저렇게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해도 내면은 그런 외면을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으니까. 얼굴만 좋다면 상관없다는 주의라도 란의 실체를 알고 나면 틀림없이 실망할 거야. 내가 보장한다. 한참을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란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고 본 하늘은 남색 바탕에 붉은 색으로 덧칠 돼 있었다. 아직 6시도 안 된 시각인데도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걸로 보아, 겨울이긴 겨울이다. 으으 추워라. 나는 교복위에 입고 있던 어두운 색 코트의 깃을 잡아 올리고, 소변이 마려운 것 마냥 떨었다. 그에 반해 란은 전혀 따뜻할 것 같지 않은 노란 계통의 얇은 스웨트 코트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인데 추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혹시, 몸속에 마더 러시아의 피라도 흐르고 있나? 란은 갑자기 후훗. 웃음 짓더니 나에게 불쑥 물어왔다. 「오늘은 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 거야.」 「왜?」 「그냥.」 친구사이에 하룻밤 정도 자고 가는 거야 상관없지만, 아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게 떠올랐다. 잠깐, 혹시 그런 쪽인 거야?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담. 아무래도 난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타락한 모양이다. 머리를 휘휘 내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 버리려는 도중, 란의 의아하다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너….」 란은 내 얼굴을 의심의 눈초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풉하는 웃음을 토해냈다.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거지?」 확신에 가까운 물음을 건넨다. 두 눈도 활처럼 휘어진 게 날 놀려먹을 생각 만만이다. 이죽대며 자꾸 묻는다. 「말해 봐 말해 봐. 틀림없이 야한 생각 한 거지?」 「아니야.」 「동성끼리인데 뭐가 그리도 부끄럽다고. 말해 봐.」 「아니라고!」 짜증을 내며 외친 말에 란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개를 쳐 든 란의 얼굴은 장난기가 넘쳐 흘렸다. 란이 양 손을 브이자로 해서 깍지를 끼우며 말했다. 「가위치기라도 떠올렸어?」 그러면서 꼈던 깍지를 뗐다가 붙였다를 반복했다. 예쁜 얼굴로 음담패설이라니. 이건 안 돼. 「말 좀 가려서 해.」 「가위가 뭐 어때서?」 능청을 떨며 모른 척 시치미 뗀다. 그런 주제에 손 움직임은 그만두지 않네. 역시 안 돼. 저런 예쁜 애가 야한 걸 기대할 거라는 생각이 들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밤 난 늑대, 아니 요망한 여우가 될지도 몰라! 나는 란의 얼굴을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 떠올렸다면 어쩔래?」 말은 이렇게 했지만, 결코 난 그쪽인건 아니다. 그래, 란에 한해서다. 그런 거야! 란이 걸음을 멈추고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에─. 그냥 떠 본 거뿐이었는데!?」 정말이었어? 하고 몰랐다는 듯이 말했다. 아──. 어떡해. 너무 경솔했어!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잘 무마시켜야지. 최대한 장난스런 얼굴을 연기하며 「농담이야.」하고 말했다. 물론, 란은 미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괜스레 구차한 변명을 덧붙였다간 되러 의심을 사게 되니 이 화제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을 하지 말자. 물어봐도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다. * 내가 사는 집은 오래된 연립주택의 2층 방이다. 주방과 붙어있는 다다미 여섯 장 정도의 단칸방이지만, 혼자서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신기하게도 란과 처음 만났던 기억이 없던 것처럼, 부모와 떨어져 자취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 역시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부모가 없이 혼자서 생활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지금 와서든 생각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 의지를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후-. 어차피 도출되는 결론은 없으니, 깊게 생각하지 말자. 현관문 옆에 놓여진 화분에 숨겨놓은 열쇠를 집어 들고, 잠겨 진 문을 연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체된 공기가 비음을 자극해 왔다. 난방이 제대로 안 된 방안이라 역시나 서늘하다. 신발을 벗고 방바닥에 발을 딛자, 차가운 기운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그때, 내 등 뒤로부터 후다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번에 코타츠 속으로 돌진하는 란이 보였다. 「아~ 추워라. 얼어 죽겠네.」 익숙한 듯 코타츠 전원을 키고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키는 모습을 보니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건 내가 아니라 란인 것 같다. 피식.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나왔다. 「따뜻한 차라도 마실래?」 「응. 난 코코아.」 내가 묻자, 바로 자신의 기호를 말하는 란. 시선은 tv에 고정된 채다.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했다. 가스불을 키고, 그 위에 물을 채운 작은 주전자를 올린다. 그리고 물이 끓을 동안 선반위에 있는 코코아 분말통을 꺼냈다. 역시, 오늘 같이 추운 날에는 코코아가 왕도긴 하다. 팔팔 끓인 물을 코코아 분말이 담겨진 컵 안에 쪼로로 따라 붓는다. 새하얀 김이 코 안을 자극해왔다. 향긋하고 달콤한 내음. 그것을 만끽하며 준비된 차를 소반 위에 놓고, 란이 있는 코타츠 위로 날랐다. 「달콤한 냄새!」 란이 와-.하고 아이 같은 반응 보였다. 저럴 때의 란은 때 묻지 않는 천진난만함 그 자체다. 뭐, 실체는 정반대지만. 란이 코코아를 음미할 동안 나는 식어버린 몸을 코타츠 안으로 밀어 넣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몫으로 놓았던 코코아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콤한 코코아의 향이 식도를 데우고 위장을 데웠다. 따뜻함 속에 평온을 얻은 나는 시선을 돌리고 tv에서 방영되는 연속극을 시청했다. 연속극의 제목은 '장미의 불륜'. 뭔 놈의 제목이 저렇담. 막장 치정물이 인기가 좋다보니 그 쪽으로 갈때 까지 가버린 모양이다. 재미는 있지만 서도. 「그 남자가 그렇게나 좋아?」 「미안해, 사실은 널 잃고 싶지 않아서 한 거짓말이었어.」 「날 잃고 싶지 않다고? 거짓말!」 「정말이야….」 「그럼, 그 날 나랑 같이 사우나에 간 이유는 뭐야?」 tv속에서 두 남자가 치정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명백히 동성애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왜지? 그런 사소한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보니 키득 거리고 있는 란의 얼굴이 보였다. 저 장면이 뭐가 그리 우스운 걸까. 극중 두 남자의 다툼이 급기야 서로의 바지를 찢는 실력 행사로 이어지자, 란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주먹으로 코타츠를 두들겨 가며 웃어댔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나도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숨을 멈추고 웃음을 참았다. 손으로 입까지 막고서. 여기서 웃었다간 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연속극이 끝이 나자, 란은 코타츠에서 나와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책가방을 찾았다. 그리고는 책가방을 뒤집어 안의 내용물을 쏟아내었다. 우루루. 당연하게도 책가방 속에서 나온 것은 교과서들이다. 하지만, 그냥 교과서는 아니다. 란이 그 중 하나를 집어 들더니 킥킥 거리며 코타츠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란이 집어 온 교과서는 껍데기만 그렇지, 내용물은 라노벨로 바꿔치기 된 가짜였다. 그걸 학교에서도 당당하게 읽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그럼에도 들킨 적이 없겠지. 미스테리하긴 해도 부모 얼굴조차 떠올릴 수 없는, 그럼에도 별 의심 없이 살아가는 나 쪽이 미스테리한 거겠지. 나는 라노벨 삼매경인 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예쁜 얼굴이지만, 마치 내 얼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익숙한 얼굴이다. 친구 얼굴이니 당연히 익숙한 게 아니냐고? 아니다. 본능 레벨의 익숙함이었다. 내 얼굴 같은 란의 얼굴. 내 얼굴.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어? 정말 희한하게도 내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란의 얼굴과 처음 보는 여자 아이의 얼굴. 그리고,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에 눈이 사르르 감겨온다. 따뜻한 코타츠 속의 온기가 잠을 재촉하고 있었다. 긴장을 너무 풀고 있었나 보다. 졸음을 참지 못한 나는 코타츠 위에 엎드린 채 달콤한 안식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의식이 끊기기 직전, 속삭이는 듯한 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랜 꿈에서 깰 시간이야. 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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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연재하기로 했으니 재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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