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고 불타고 쓰러져 커다란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대나무들 사이의 한 공터에 두명의 여성이 서 있었다. 환상향의 어느 여름날이자, 또한 바람 한점도 구름 한점도 없이 초롱초롱한 별들과 아직 채 완전해지지 않은 달만이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밤에. 거의 모든 인간들이 잠들고 대다수의 요괴들마저 잠들어버려 침묵에 잠긴 시간에. 그리고 대나무로 빽빽히 채워지고 안개로 끈기를 더해 녹색의 심해라 할 수 있는 미혹의 죽림에서.
그중 한명은 리본으로 장식되어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디 긴 백발과 아무한테도 알려지지 않은채 혼자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을 가진 소녀였다. 후지와라노 모코우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과 닮은 존재는 자신의 친구가 가방을 뒤적이는 것을 불안한 눈초리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떨어진 것을 다시 붙이기라도 한듯 힘 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이윽고, 진한 빛깔의 액체가 담긴 작은 병과 탈지면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코우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친구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모코우는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천천히, 그리고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만큼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허나, 몇걸음 가지 못한채 들키고야 말았다.「가만히 있어요. 모코우."
푸른빛이 감도는 은발 위로 바깥 세계의 학사모와 비슷한 모자를, 그리고 아래로 요괴의 것으로 보이는 붉게 빛나는 눈을 가진 소녀는 순식간에 모코우한테로 다가와 팔을 잡아당겼다.
「아, 아파 아파! 케이네! 아프다고!」
그대로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소녀를 끌고 와 바닥에 앉히고, 곧이어 자신도 따라 앉았다. 모코우는 인간 마을의 선생님이자, 환상향의 현자 겸 역사가,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의 손에 들린 갈색의 액체로 적셔진 탈지면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지막히 들려오는 올빼미 소리를 따라, 케이네의 손은 점점 모코우 팔의 상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봉래인의 심장은 더 크게 고동쳤다.
아직 채 닿기도 전에 모코우는 엄살을 시작했다.「아야야야!」
「아직 닿지도 않았어요. 죽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왜그리 심한 건지.」
모코우는 투덜댔다.「그, 그래도... 죽어야 할 고통은 많이 겪어 봤지만 이런 느낌은 익숙치가 않다고.」
케이네는 그대로 상처에 약을 묻혀 침묵만을 남게 하였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낸 모코우는 팔에서 풍기는 약 특유의 냄새를 한번 맡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팔을 코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케이네는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금방 수복될 텐데 왜 매번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케이네를 보며, 모코우는 의아함을 표현했다.「저기? 케이네? 듣고 있는 거야?」
「이렇게 해야 안심된다고나 할까요. 죽음이라는 이름의 변화 없이 삶만을 영원히 살아야 하는 당신을 생각하면, 내가 있는 지금 이때라도 잘 해줘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에요..」
모코우는 의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땅을 짚고 조용히 일어섰다.「그럼 나는 이만 가볼께.」
하지만 케이네는 모코우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던 듯 어깨를 붙잡아 세우며 말했다.「새벽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잠시 집에서 묵고 갈래요?」
케이네를 바라보는 모코우의 눈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늘어졌다. 케이네는 그것을 보았지만 무슨 의미인가를 알지 못했다.
잠시 후, 모코우는 케이네와 함께 정원을 마주해 앉았다. 케이네의 집은 서당의 별채라 봐도 무방할 크기와 위치를 하고 있으며, 벽은 흰색으로 지붕은 파란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져 있는 아늑한 집이었다. 모코우는 달빛 아래, 그리고 어긋난 달걀 모양의 잎들의 위에 푸른 색채를 뿌리며 피어 있던 파란색의 꽃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꽃들은 뭐야? 못보던 것들인데.」
케이네는 답을 해주었다.「로벨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에요. 예전에 선물받았어요. "얼마 전에 바깥 세계로부터 들여왔어. 분명 너한테 어울릴 거야"라는 편지와 함께요.」
누가 이 꽃들을 환상향에 들여놓은 것인지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둘은 차와 백병과 함께, 짧게 끊어지는 대화를 나누며 얼마 남지 않은 밤을 흘려보냈다.
「네? 꽃말이요? 그러니까……. 불신, 원망, 그리고 하나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래? 별로 좋은 말들은 아니네.」
케이네는 모코우의 말소리가 메말라 있다는 것을 느꼈다. 허나 아까의 일로 지쳐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곧바로 대화의 주제를 다른것으로 돌렸다.
「그거 아세요?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달이 서서히 뉘여지고 빛을 잃기 시작해 새벽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자, 모코우는 케이네의 말을 끊었다.「케이네 너는 오늘은 어떻게 할거야?」
덧없이 붉은 눈으로 달을 바라보던 케이네는 몸을 일으키며 모코우한테 답했다.「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밤새도록 붙잡고 있어야죠. 그런 고로, 지금부터 좀 잘테니까 조용히 있어 줘요.」
케이네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모코우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달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개벽을 알리는 빛이 동천에 모습을 보이자, 케이네가 들어간 문 앞으로 조용히 걸어가 문 앞에 섰다. 허나, 문을 열려던 손을 잠시 멈칫하고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다가, 그대로 손을 거두고 밖으로 나섰다.
아침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낮이 되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대로 황혼녘까지 계속되어 내려왔다. 케이네는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과 두루마리를 앞에 둔 채, 잠시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커피에 빗소리까지 곁들인 채로. 한달에 한번, 있는 일을 앞두고 활력을 충전하고 있는 것이다.
케이네의 뒤에서 모코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나 왔어, 케이네.」
케이네는 몸을 돌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모코우를 보았다. 로벨리아가 꽂혀 있는 꽃병의 물을 갈고, 모코우의 머리가 헝클어진 것에 의문을 가지며 케이네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모코우? 갈때는 아무런 말 없이 가더니……. 그건 그렇고, 분명 오늘은 바쁘다고 말했을 텐데요? 설마 제대로 듣지 않은 건가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코우를 보며 케이네는 말을 멈췄고, 곧바로 한숨을 쉬며 나갔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흘러 모코우가 긴장을 풀려는 찰나, 머리빗을 들고는 다시 들어왔다. 케이네는 모코우의 리본을 풀고,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주며 옛날 이야기를 풀었다.
「하여간, 당신은 하나도 바뀐게 없어요. 처음 만났을때 생각나요? 오늘 새벽처럼 만신창이가 되서는, 죽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죠. 하지만 그 모습에서는 비장함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처절함만이 느껴졌죠. 그 모습을 보면서 측은함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을 거에요.」
모코우는 얼어붙은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케이네는 조용히 모코우의 머리를 쓰다듬듯 매만지며 불현듯 푸른색의 꽃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친구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케이네는 꽃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모코우는 입을 뗐다.「측은함이라, 그렇다면 케이네, 너는 나를 동정했다는 거야?」
「처음에는 동정했었죠. 어쩌면 지금도 그러고 있을 수 있겠네요. 당신이 강한 척을 하는 것을 볼때마다, 당신이 메고 있는 짐들이 똑똑히 보이거든요. 그 짐을 같이 짊어지기 위해 노력을 해 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죠.」
모코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은 창피함을 표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모코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서는 케이네를 거의 노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라…….」
케이네는 모코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렸다.「당신은 봉래인이에요, 모코우. 그냥 평범한 반인반수일 뿐인 나는 당신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시도하고, 또 시도해봐도 소용이 없었죠. 그저, 이해하는 척만 해줄 수 있을 뿐이에요. 당신이 나를 믿는 것과는 상관 없이 말이에요.」
케이네의 머릿결에서 녹색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케이네는 창문 밖을 내다보아 달이 떠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황급히 모코우를 거의 쫓아내듯 밖으로 밀어낸 다음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모코우는 반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말 없이 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케이네는 딱딱한 말과 함께 문을 살짝 열고 리본을 건내준 다음, 처음보다 더 커다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버렸다.
「알았어. 그러면 케이네, 내일 봐.」
모코우는 말을 마치며, 무엇인가 풀리지 않은 것이 있다는 표정을 잠시 내보였다. 그리고, 자신한테 걸린 약속을 기억해내자, 아직 마르지 않은 우산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카구야! 어디있어!」
어느샌가 비가 그쳐 밤이 되었다. 구름들 사이로 밝은 자태를 드러낸 만월 아래, 모코우는 재로 뒤덮인 죽림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 전날의 밤 이야기를 할 때이다. 죽림의 일부를 갉아먹던 불이 아직 꺼지지도 않았고, 안개도 끼지 않았을 때, 모코우는 불길을 짓밟고 서 있었다. 상처투성이에 한쪽의 팔은 아예 떨어져 다른 팔로 쥐고 있는 모습으로, 마치 쓰러지지 못하니 서있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모코우는 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코우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벌써 지쳐버린 거야?」
멀쩡한 대나무들 중, 가장 불완전한 원의 모습을 취한 달을 후광으로 삼아 서있던 긴 흑발의 소녀 호라이산 카구야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봉래인은 자신의 앙숙을 내려다보며 한 손으로 봉래의 옥가지라 불리우는 보물을 쥐어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 싸움의 결착은 내일 짓도록 할까? 모코우 너의 친구이자…….」
이 시점, 카구야는 말을 잠시 끊으며 무엇인가를 고민하는듯 머리를 살짝 갸웃댔고, 이어 선물을 예고받은 아이가 지을 법할 즐거움을 기다리는 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이윽고, 카구야는 미소를 거두며 말을 마쳤다.「동정자인 케이네한테 보살핌도 좀 받고…….」
「동정자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카구야는 자신의 말을 끊으며, 싸늘한 표정을 짓는 모코우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무슨 소리야. 나는 그저 모코우가 착각하는 것을 똑바로 알려주는 것 뿐이라고. 다른 생각은 없어.」
말을 마치며 카구야는 예의 미소를 한번 더 지어준 뒤, 모코우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모코우는 쫓아가려 했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몇걸음 가지 않고 멈춰버렸다. 이윽고 모코우는 주변의 대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는 잔잔하게 들려오는 벌레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불이 사그라들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달이 흘러가고, 자신의 친구가 나타날 때까지. '지금까지 케이네가 나한테 보였던, 그리고 해주었던 것들이……. 그럴리 없지. 카구야는 그저 나를 놀릴 생각밖에는 없었을 거야.'
모코우의 생각은 정답에 가까웠다. 카구야는 그저 해묵다 못해 썩어버리고, 썩다 못해 완전히 사라져버렸을 모코우와의 원한 관계에 새로움을 불어넣고 싶었던 것 뿐이었고, 케이네를 그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구야의 말은 모코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그 말을 떼어내려고 할 수록 더더욱 확실해졌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모코우는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카구야와의 결착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지 오래였다. 그리고 카구야가 나타나지 않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모코우는 망설임 없이 죽림을 떠났다.
서당은 듣기조차 힘든 붓소리를 빼면 완전히 고요했다. 케이네는 머리에는 두개의 뿔이 달리고, 푸른색의 머리와 옷은 초록색으로 바뀐, 완전한 요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케이네는 그 인기척 중, 자신의 것만큼이나 익숙한 발소리를 잡아내고, 뒤를 돌아보려 했다.
「모코……. 꺄악!」
짧은 비명, 그리고 쨍그랑 소리와 함께 케이네는 양 어깨를 잡혀 들렸다. 모코우는 들어올려진 케이네를 천천히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케이네는 모코우의 눈, 일전의 꺼지기 전의 불씨와 같은 빛을 내는 눈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체 무슨 일때문에 이러는 거에요?」
모코우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잠시 생각을 해 봤어. 케이네, 너는 나를 동정한다고 했었지.」
「그게 무슨 소리죠? 모코우, 나는 당신을……. 크흑!」
모코우는 케이네를 벽으로 밀쳤다. 고통스러워하는 케이네를 앞두고, 모코우는 거의 혼자서 중얼대는 투의 말을 시작했다.
「아니야, 말하지 않아도 돼. 케이네 너는 분명히 나한테 동정한다고 말했어. 그래, 케이네. 너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어. 그저 겉으로는 나한테 웃어주며, 속으로는 비웃었을 뿐이야.」
케이네는 아니라는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모코우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말라 비틀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케이네, 케이네. 동정을 해주고 있었다니, 그럴 줄은 몰랐어. 그건 고마워,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냐 하면…….」
모코우는 케이네의 어깨에서 한 손을 떼었다. 케이네는 모코우의 마음이 풀렸거니 생각했지만, 곧이어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코우는 다시 케이네한테로 손을 뻗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죽음을 겪어야 하는 이들한테는 동정받고 싶지 않았거든. 아니, 아니야. 케이네, 나는 동정받는 것을 혐오해.」
그 말과 함께, 모코우는 케이네의 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캑캑거리는 소리만 입에서 힘 없이 흘려내는 케이네의 처절한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모코우는 말을 계속 이었다.
「지금까지 용케도 속여왔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럼 케이네…….」
모코우의 마지막 말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에 파묻혔다. 이윽고, 모코우는 케이네를 놓아 주었다. 힘 없이 스러지는 케이네를 뒤로 하고, 떨어져 깨져버린 꽃병 조각과 물과 꽃을 짓밟으며 모코우는 밖으로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중 한명은 리본으로 장식되어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디 긴 백발과 아무한테도 알려지지 않은채 혼자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을 가진 소녀였다. 후지와라노 모코우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과 닮은 존재는 자신의 친구가 가방을 뒤적이는 것을 불안한 눈초리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떨어진 것을 다시 붙이기라도 한듯 힘 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이윽고, 진한 빛깔의 액체가 담긴 작은 병과 탈지면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코우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친구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모코우는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천천히, 그리고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만큼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허나, 몇걸음 가지 못한채 들키고야 말았다.「가만히 있어요. 모코우."
푸른빛이 감도는 은발 위로 바깥 세계의 학사모와 비슷한 모자를, 그리고 아래로 요괴의 것으로 보이는 붉게 빛나는 눈을 가진 소녀는 순식간에 모코우한테로 다가와 팔을 잡아당겼다.
「아, 아파 아파! 케이네! 아프다고!」
그대로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소녀를 끌고 와 바닥에 앉히고, 곧이어 자신도 따라 앉았다. 모코우는 인간 마을의 선생님이자, 환상향의 현자 겸 역사가,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의 손에 들린 갈색의 액체로 적셔진 탈지면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지막히 들려오는 올빼미 소리를 따라, 케이네의 손은 점점 모코우 팔의 상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봉래인의 심장은 더 크게 고동쳤다.
아직 채 닿기도 전에 모코우는 엄살을 시작했다.「아야야야!」
「아직 닿지도 않았어요. 죽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왜그리 심한 건지.」
모코우는 투덜댔다.「그, 그래도... 죽어야 할 고통은 많이 겪어 봤지만 이런 느낌은 익숙치가 않다고.」
케이네는 그대로 상처에 약을 묻혀 침묵만을 남게 하였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낸 모코우는 팔에서 풍기는 약 특유의 냄새를 한번 맡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팔을 코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트렸다. 케이네는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금방 수복될 텐데 왜 매번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케이네를 보며, 모코우는 의아함을 표현했다.「저기? 케이네? 듣고 있는 거야?」
「이렇게 해야 안심된다고나 할까요. 죽음이라는 이름의 변화 없이 삶만을 영원히 살아야 하는 당신을 생각하면, 내가 있는 지금 이때라도 잘 해줘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에요..」
모코우는 의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땅을 짚고 조용히 일어섰다.「그럼 나는 이만 가볼께.」
하지만 케이네는 모코우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던 듯 어깨를 붙잡아 세우며 말했다.「새벽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잠시 집에서 묵고 갈래요?」
케이네를 바라보는 모코우의 눈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늘어졌다. 케이네는 그것을 보았지만 무슨 의미인가를 알지 못했다.
잠시 후, 모코우는 케이네와 함께 정원을 마주해 앉았다. 케이네의 집은 서당의 별채라 봐도 무방할 크기와 위치를 하고 있으며, 벽은 흰색으로 지붕은 파란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져 있는 아늑한 집이었다. 모코우는 달빛 아래, 그리고 어긋난 달걀 모양의 잎들의 위에 푸른 색채를 뿌리며 피어 있던 파란색의 꽃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꽃들은 뭐야? 못보던 것들인데.」
케이네는 답을 해주었다.「로벨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에요. 예전에 선물받았어요. "얼마 전에 바깥 세계로부터 들여왔어. 분명 너한테 어울릴 거야"라는 편지와 함께요.」
누가 이 꽃들을 환상향에 들여놓은 것인지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둘은 차와 백병과 함께, 짧게 끊어지는 대화를 나누며 얼마 남지 않은 밤을 흘려보냈다.
「네? 꽃말이요? 그러니까……. 불신, 원망, 그리고 하나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래? 별로 좋은 말들은 아니네.」
케이네는 모코우의 말소리가 메말라 있다는 것을 느꼈다. 허나 아까의 일로 지쳐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곧바로 대화의 주제를 다른것으로 돌렸다.
「그거 아세요?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달이 서서히 뉘여지고 빛을 잃기 시작해 새벽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자, 모코우는 케이네의 말을 끊었다.「케이네 너는 오늘은 어떻게 할거야?」
덧없이 붉은 눈으로 달을 바라보던 케이네는 몸을 일으키며 모코우한테 답했다.「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밤새도록 붙잡고 있어야죠. 그런 고로, 지금부터 좀 잘테니까 조용히 있어 줘요.」
케이네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모코우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달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개벽을 알리는 빛이 동천에 모습을 보이자, 케이네가 들어간 문 앞으로 조용히 걸어가 문 앞에 섰다. 허나, 문을 열려던 손을 잠시 멈칫하고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다가, 그대로 손을 거두고 밖으로 나섰다.
아침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낮이 되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대로 황혼녘까지 계속되어 내려왔다. 케이네는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과 두루마리를 앞에 둔 채, 잠시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커피에 빗소리까지 곁들인 채로. 한달에 한번, 있는 일을 앞두고 활력을 충전하고 있는 것이다.
케이네의 뒤에서 모코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나 왔어, 케이네.」
케이네는 몸을 돌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모코우를 보았다. 로벨리아가 꽂혀 있는 꽃병의 물을 갈고, 모코우의 머리가 헝클어진 것에 의문을 가지며 케이네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모코우? 갈때는 아무런 말 없이 가더니……. 그건 그렇고, 분명 오늘은 바쁘다고 말했을 텐데요? 설마 제대로 듣지 않은 건가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코우를 보며 케이네는 말을 멈췄고, 곧바로 한숨을 쉬며 나갔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흘러 모코우가 긴장을 풀려는 찰나, 머리빗을 들고는 다시 들어왔다. 케이네는 모코우의 리본을 풀고,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주며 옛날 이야기를 풀었다.
「하여간, 당신은 하나도 바뀐게 없어요. 처음 만났을때 생각나요? 오늘 새벽처럼 만신창이가 되서는, 죽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죠. 하지만 그 모습에서는 비장함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처절함만이 느껴졌죠. 그 모습을 보면서 측은함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을 거에요.」
모코우는 얼어붙은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케이네는 조용히 모코우의 머리를 쓰다듬듯 매만지며 불현듯 푸른색의 꽃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친구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케이네는 꽃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모코우는 입을 뗐다.「측은함이라, 그렇다면 케이네, 너는 나를 동정했다는 거야?」
「처음에는 동정했었죠. 어쩌면 지금도 그러고 있을 수 있겠네요. 당신이 강한 척을 하는 것을 볼때마다, 당신이 메고 있는 짐들이 똑똑히 보이거든요. 그 짐을 같이 짊어지기 위해 노력을 해 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죠.」
모코우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은 창피함을 표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모코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서는 케이네를 거의 노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라…….」
케이네는 모코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렸다.「당신은 봉래인이에요, 모코우. 그냥 평범한 반인반수일 뿐인 나는 당신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시도하고, 또 시도해봐도 소용이 없었죠. 그저, 이해하는 척만 해줄 수 있을 뿐이에요. 당신이 나를 믿는 것과는 상관 없이 말이에요.」
케이네의 머릿결에서 녹색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케이네는 창문 밖을 내다보아 달이 떠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자, 황급히 모코우를 거의 쫓아내듯 밖으로 밀어낸 다음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모코우는 반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말 없이 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케이네는 딱딱한 말과 함께 문을 살짝 열고 리본을 건내준 다음, 처음보다 더 커다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버렸다.
「알았어. 그러면 케이네, 내일 봐.」
모코우는 말을 마치며, 무엇인가 풀리지 않은 것이 있다는 표정을 잠시 내보였다. 그리고, 자신한테 걸린 약속을 기억해내자, 아직 마르지 않은 우산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카구야! 어디있어!」
어느샌가 비가 그쳐 밤이 되었다. 구름들 사이로 밝은 자태를 드러낸 만월 아래, 모코우는 재로 뒤덮인 죽림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 전날의 밤 이야기를 할 때이다. 죽림의 일부를 갉아먹던 불이 아직 꺼지지도 않았고, 안개도 끼지 않았을 때, 모코우는 불길을 짓밟고 서 있었다. 상처투성이에 한쪽의 팔은 아예 떨어져 다른 팔로 쥐고 있는 모습으로, 마치 쓰러지지 못하니 서있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모코우는 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코우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벌써 지쳐버린 거야?」
멀쩡한 대나무들 중, 가장 불완전한 원의 모습을 취한 달을 후광으로 삼아 서있던 긴 흑발의 소녀 호라이산 카구야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봉래인은 자신의 앙숙을 내려다보며 한 손으로 봉래의 옥가지라 불리우는 보물을 쥐어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번 싸움의 결착은 내일 짓도록 할까? 모코우 너의 친구이자…….」
이 시점, 카구야는 말을 잠시 끊으며 무엇인가를 고민하는듯 머리를 살짝 갸웃댔고, 이어 선물을 예고받은 아이가 지을 법할 즐거움을 기다리는 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이윽고, 카구야는 미소를 거두며 말을 마쳤다.「동정자인 케이네한테 보살핌도 좀 받고…….」
「동정자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카구야는 자신의 말을 끊으며, 싸늘한 표정을 짓는 모코우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무슨 소리야. 나는 그저 모코우가 착각하는 것을 똑바로 알려주는 것 뿐이라고. 다른 생각은 없어.」
말을 마치며 카구야는 예의 미소를 한번 더 지어준 뒤, 모코우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모코우는 쫓아가려 했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몇걸음 가지 않고 멈춰버렸다. 이윽고 모코우는 주변의 대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는 잔잔하게 들려오는 벌레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불이 사그라들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달이 흘러가고, 자신의 친구가 나타날 때까지. '지금까지 케이네가 나한테 보였던, 그리고 해주었던 것들이……. 그럴리 없지. 카구야는 그저 나를 놀릴 생각밖에는 없었을 거야.'
모코우의 생각은 정답에 가까웠다. 카구야는 그저 해묵다 못해 썩어버리고, 썩다 못해 완전히 사라져버렸을 모코우와의 원한 관계에 새로움을 불어넣고 싶었던 것 뿐이었고, 케이네를 그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구야의 말은 모코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런 이유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그 말을 떼어내려고 할 수록 더더욱 확실해졌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모코우는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카구야와의 결착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지 오래였다. 그리고 카구야가 나타나지 않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모코우는 망설임 없이 죽림을 떠났다.
서당은 듣기조차 힘든 붓소리를 빼면 완전히 고요했다. 케이네는 머리에는 두개의 뿔이 달리고, 푸른색의 머리와 옷은 초록색으로 바뀐, 완전한 요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케이네는 그 인기척 중, 자신의 것만큼이나 익숙한 발소리를 잡아내고, 뒤를 돌아보려 했다.
「모코……. 꺄악!」
짧은 비명, 그리고 쨍그랑 소리와 함께 케이네는 양 어깨를 잡혀 들렸다. 모코우는 들어올려진 케이네를 천천히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케이네는 모코우의 눈, 일전의 꺼지기 전의 불씨와 같은 빛을 내는 눈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대체 무슨 일때문에 이러는 거에요?」
모코우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잠시 생각을 해 봤어. 케이네, 너는 나를 동정한다고 했었지.」
「그게 무슨 소리죠? 모코우, 나는 당신을……. 크흑!」
모코우는 케이네를 벽으로 밀쳤다. 고통스러워하는 케이네를 앞두고, 모코우는 거의 혼자서 중얼대는 투의 말을 시작했다.
「아니야, 말하지 않아도 돼. 케이네 너는 분명히 나한테 동정한다고 말했어. 그래, 케이네. 너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았어. 그저 겉으로는 나한테 웃어주며, 속으로는 비웃었을 뿐이야.」
케이네는 아니라는 듯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모코우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말라 비틀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케이네, 케이네. 동정을 해주고 있었다니, 그럴 줄은 몰랐어. 그건 고마워,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냐 하면…….」
모코우는 케이네의 어깨에서 한 손을 떼었다. 케이네는 모코우의 마음이 풀렸거니 생각했지만, 곧이어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코우는 다시 케이네한테로 손을 뻗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는 죽음을 겪어야 하는 이들한테는 동정받고 싶지 않았거든. 아니, 아니야. 케이네, 나는 동정받는 것을 혐오해.」
그 말과 함께, 모코우는 케이네의 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캑캑거리는 소리만 입에서 힘 없이 흘려내는 케이네의 처절한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모코우는 말을 계속 이었다.
「지금까지 용케도 속여왔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럼 케이네…….」
모코우의 마지막 말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에 파묻혔다. 이윽고, 모코우는 케이네를 놓아 주었다. 힘 없이 스러지는 케이네를 뒤로 하고, 떨어져 깨져버린 꽃병 조각과 물과 꽃을 짓밟으며 모코우는 밖으로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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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던 소설의 문체를 어설프게 따라해서 쓴 글. 어설퍼, 겁나 어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