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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키산의 기슭. 죽은 야마타노오로치의 피가 스며든 땅에서 태어난 요괴가 있었다. 그 요괴는 저주받은 대요의 피를 이었지만,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을 한 순박한 소녀였다. 소녀는 이부키산에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기에 주변으로 부터 산의 명칭을 딴 이부키동자라고 불렸다. 산기슭에서 홀로 살아가던 소녀는 종종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가곤 했는데. 산에는 짐승과 피에 굶주린 맹수. 그리고 말이 안 통하는 요괴들만 있었기에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날 적부터 지니고 있던 기묘한 힘과 난폭한 성격으로 인해 소녀는 마을의 인간들에게 미움과 두려움을 사게 되었고, 그 탓에 산에서 내려와 마을로 갈 때마다 배척받아 내쫒기는 일이 허다했다. 한 날은 요괴가 마을에 내려오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퇴치하려고 들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마을에 내려가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모두에게 배척받는다 하더라도 그 중에서 자신을 편견 없이 봐주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 어린 자녀를 잃었던 노부부가 그랬다. 노부부는 마을 안에서 유일하게 소녀를 친근하게 대하는 인간이었다. 노부부는 소녀가 올 때 마다 궁핍한 살림에도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대접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손녀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소녀는 노부부에게 정을 느끼고, 날이 갈수록 그들의 집에 찾아가는 횟수를 늘려갔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 어느 날이었다. 소녀는 평소와 같이 마을에 내려와 노부부의 집으로 갔다. 올 때 마다 자신에게 한 끼 식사와 함께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던 노부부이기에 소녀는 오늘 특별히 그 보답 삼아 토끼와 꿩을 사냥하고 온 참이었고, 그 증거로 소녀의 양 손에는 각각 토끼와 꿩의 시체가 들려 있었다. 대신, 행색은 꽤나 누추했다. 헝겊에 가까운 옷은 흙과 나뭇가지로 지저분했고, 얼굴은 때가 꼬질꼬질한 게 전체적으로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어디 저잣거리에서 동냥질 하는 거지들도 소녀 보다 말끔해 보일 것이다. 코가 흘려 나오는 인중을 팔목으로 슥슥 닦아댄 소녀는 노부부의 집 문을 서슴없이 열어 재꼈다. 언제나와 같이 자신을 밝은 미소로 맞이하던 노부부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찰나, 소녀는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얼마 되지도 않는 살림살이 도구들이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는 광경에 소녀는「할배, 할매 없어?」하고 노부부를 불러보았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소녀는 이어 주인이 부재중인 집안을 둘려보다 들고 있던 토끼와 꿩을 한쪽 구석에 내려놓았다. 향상 훈훈한 온기가 가득했던 노부부의 집은 오늘 따라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싸늘하게 느껴졌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집이라는 듯이. 이상함을 느낀 소녀는 혹시 모를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걱정 들어 노부부를 찾기로 했다. 어쩌면 산짐승이나 요괴에게 물려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감이 소녀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서둘러 노부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집밖으로 나선 소녀의 눈앞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날붙이를 들이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뭐야? 너희들.」 저마다 무기를 들고 자신을 막고 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녀는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척 봐도 자신을 퇴치 할 요량으로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은 소녀에게 있어 짜증나는 방해물에 불과했다.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비켜!」 소녀는 자신에게 겨누어진 검을 옆으로 밀어내고, 앙칼진 고함을 쳤다. 소녀는 한 시가 급했기에 이들과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을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날붙이는 아까 보다 더 들이 밀어졌고, 주춤거리는 소녀를 노려보며 마을 사람 하나가 말했다. 「이 요물놈! 오늘은 무사히 살아 돌아 갈 거라 생각지 말아라!」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부부가 사라진 것도, 마을 사람들이 집 앞에서 대기 중이었던 것도 다 자신을 처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허나, 노부부가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노부부의 행방을 쥐고 있다는 게 된다. 소녀가 살기를 띤 눈으로 노부부의 행방을 물었다. 「네놈들은 알고 있지? 할배, 할매가 어딨는지.」 「여기서 죽을 놈에게 알려 줄 이유는 없다.」 검을 겨누고 있던 남자는 알고 있으나 알려주지 않겠다는 대답을 들려주고는 검을 휘둘려왔다. 휘익-! 가로로 내리 그어지는 검선이 소녀의 목을 향했다. 본디 검을 다루는 검객이나 무사가 아니었으니 정 일자가 되지 못한 깔끔하지 않은 궤도였으나, 실려 있는 힘으로 보아 여린 소녀의 목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날리고도 남을 검극이었다. 헌데 소녀는 그 검의 궤적을 눈으로 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피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검극이 도중에 멈췄다. 정확히, 소녀의 목에 닫기 직전이었다. 멈춰진 검 날 부분에 소녀의 손가락이 날 부분에 얹혀있었다. 남자는 순간 당황하여 검을 다시 되돌리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요물이!」 역시, 요물이다. 겉보기엔 지저분한 여자애로 보이지만, 자신의 검 날을 잡고 있는 저 손아귀 힘을 보라. 어지간한 요괴도 한 수 접을 정도였다. 소녀가 손가락 튕기듯 검 날을 놓아주자 남자는 중심을 잡지 못해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에 마을 사람들을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소녀를 향해 자신이 가진 무기를 동시에 휘둘렸다. 검, 창, 낫, 괭이 등 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까지 섞여 소녀의 숨통을 끊기 위해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리쳐 졌다. 그 순간,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기와 농기구들은 부질없이 허공을 가르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퍼석하고 박혀들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사라진 소녀의 모습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옮겨댔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그들의 등 뒤로 부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걸로 정말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 고개를 돌린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의 뒤편에서 이를 드려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노부부의 행방을 물었다. 「어서 말해. 할배, 할매가 어딨는지.」 「그래. 소원대로 알려주지.」 대답한 것은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소녀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뒤를 돌아보자, 지긋한 나이의 퇴마사가 영력을 담은 부적을 날리고 있었다. 파지직! 퇴마사가 날린 부적이 소녀의 몸에 붙었고, 곧이어 파란색의 불꽃이 튀어 올랐다. 소녀는 그 부적의 힘으로 인해 움직임이 봉쇄당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런 소녀를 향해 퇴마사는 또 한 장의 부적을 날렸다. 끝장을 내려는 건지 부적에는 푸른 화염을 품고 있었다. 「그 집의 노부부는 널 감싼 일로 인해 죗값을 치루고 있는 중이지.」 부적의 푸른 화염이 소녀의 몸을 집어 삼켰다. 어차피 알려 줘봤자 소용없겠지만, 저승행 선물 삼아 노부부에 대해 발설한 퇴마사는 푸른 불꽃과 함께 재가 되어가는 소녀를 보며 무심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리고 자기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몸을 돌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푸른 화염이 걷히고 남은 것은 재가 된 소녀의 시신이 아닌, 입고 있던 옷만 태웠을 뿐, 거슬린 흔적조차도 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퇴마사는 질겁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부적 몇 장을 꺼내 들었다. 분명, 재로 만들었을 텐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진언을 외웠다. 몇 소절 읊어대자, 퇴마사의 손에 들린 부적에 영력이 깃들어 푸른 불길을 휘감기 시작했다. 퇴마사는 그것을 눈앞의 요물에게 날렸다. 날려진 부적의 수는 세 장. 한 장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요괴는 잿더미로 만들 위력이지만, 아까 피해가 거의 없다시피 한 모습이었기에 유추해, 소녀가 보통이 넘는 요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무사하지 못할 거라 확신하며 날려진 부적은 맹렬한 푸른색 불길에 타오르며 소녀를 향해 날아갔지만, 도중에 방향을 틀어 도리어 퇴마사를 쪽으로 날았다. 「으아아앗!」 이윽고, 요물을 삼켰어야 할 푸른 불길은 퇴마사를 삼켰다. 퇴마사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재가 되어갔다. 그렇게 퀘퀘한 탄내만 풍기는 시커먼 시체가 되어버린 퇴마사. 그는 죽어서도 모를 것이다. 어째서 요물에게 날렸던 청화의 부적이 도리어 자신을 삼키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러나 마을 사람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저것도 소녀가 부리는 기묘한 힘의 일종이라는 것을. 믿었던 퇴마사가 죽어버리고 나자,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소녀를 막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럴 힘도 없었고, 의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화풀이로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았으면 하는 자기 몸보신의 생각뿐이었다. 소녀는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할배, 할매가 어딨는지 당장 불라고!」 처음엔 무기를 겨누고선 겁박 질을 했었던 마을 사람들은 이젠 서로에게 대답을 미루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그 중에서 가장 유약해 보이는 남자가 등을 떠밀리다 시피 입을 열고, 소녀의 물음에 힘겹게 답했다. 「마을 한 복판에서 공개 처형 받고 있을 겁니다..」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음색이 떨리다 못해 반쯤 우는 목소리였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멀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심의 한숨을 내쉬고는 털썩 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은 겁도 없이 요물에게 대들었던 일로 인해 다 타버린 퇴마사의 길동무가 될 처지를 각오했어야 했었다. 그러니 그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다는 안도감으로 두 다리가 풀려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로서 알게 된 것은 소녀는 평범한 퇴마사 한 명 가지고는 절대 퇴치 할 수 없는 강한 요괴라는 사실이었다. * 소녀가 마을의 중심지에 왔을 땐,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 소란의 진원지에는 잘 알던 노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처형이 되지 않았는지 무사한 모습이었지만, 그 몰골을 결코 멀쩡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노부부는 포박당한 상태로 무릎을 꿇고 있었고, 얼굴은 머리에서 흘려 내린 피와 멍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중 부인의 상태가 심각했다. 이미 의식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구고,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축 쳐져있는 모습이었다. 「할배, 할매!」 그 광경에 소녀가 큰소리로 노부부를 부르며 그 모습을 드려내자, 번잡하게 몰려있던 사람은 맹수를 보는 듯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노부부를 이 자리를 빌려 모두의 손으로 처형하고자 했던 촌장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뒷걸음질 치다 돌부리에 발이 걸러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왜.. 살아 있는 거냐?」 노부부를 끌어내고 그를 찾아온 소녀를 끝장내도록 하는 계획을 짰던 것은 다름 아닌 촌장이었다. 그는 지금쯤이면 의뢰를 청구했던 퇴마사의 의해 퇴치되었어야 했을 소녀가 멀쩡히 살아서 노부부를 찾은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했다. 퇴마사의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했는가? 땅에 엉덩이를 찢은 상태로 뒤를 향해 발을 질질 끌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경악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듯 했다. 소녀의 등장에 놀라한 것은 촌장뿐만이 아니라 노부부를 책망하며 돌을 던지던 마을 사람 모두였다. 이 두렵기 그지없는 요물은 반쯤 타다만 옷으로 반라에 가까운 행색이었고, 흉폭한 맹수와 같은 눈으로 자신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공포심을 견디다 못해 그대로 혼절하는 이도 있었다. 남자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물에 대항하고자 하는 용감한 이는 없었고, 제 한 목숨 살자고 기절하는 부인이나 딸을 내팽개친 채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 중에서 영웅심이 가득한 꼬마 애들 몇몇이 겁도 없이 땅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소녀를 향해 던져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부모나 어른들이 가까스로 말리는 것으로 꼬마들의 용감한 행동은 금방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 혼란스런 와중에 소녀의 관심은 오로지 노부부의 안위였다. 자신과 연관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로 부터 험한 꼴을 당해버린 노부부를 보며 소녀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느끼는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노부부가 이렇게 된 것은 자기 탓이다. 소녀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노부부에게 해코지를 한 마을 사람을 용서 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은 자신이 원흉일 텐데. 어째서 상관없는 노부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그런 분노도 잠시, 소녀는 눈앞에 위급한 노부부를 놔두고 자신의 분노를 우선치 않았다. 복수심 보다 노부부가 우선이었다. 소녀는 증오가 담긴 눈으로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는 것을 끝으로 다친 노부부에게 다가갔다. 「할배. 괜찮아?」 노인의 몸 상태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온 소녀는 걱정스레 말을 건네었다. 그러나 노인은 소녀의 걱정에 화답해주지 않았다. 이전에 자신을 바라보던 따뜻한 눈이 아닌,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소녀를 노려보며 떨리는 입술로 증오가 담긴 저주를 내뱉었다. 「너 때문이다. 네가 내 부인을 죽인거야!!」 「하..할배. 할매, 죽은 거야?」 「썩 꺼져 버려! 네 같은 요물 따위 친하게 대해주는 게 아니었어!」 「할배...」 「네가.. 네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을 책망하는 노인을 보며 소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의 말대로 자신이 찾아왔으니까. 자신은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인 노부부와 친하게 지내려 했으니까. 결국, 할매를 죽게 만든 것도, 할배를 슬프게 만든 것도 자신의 탓이었다. 소녀는 작게 소리를 내지 않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미안해.' 슬픔과 증오로 가득찬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음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소녀는 노인의 바람대로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대로 등을 돌려 노인으로 부터 멀어져 갔다.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가는 소녀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쓸쓸한 모양새였다. * 마을을 벗어난 직후, 소녀는 자신이 살던 이부키산으로 향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친했던 노부부를 잃은 소녀는 이대로 방방곳곳을 떠돌며 여행하기로 정한 것이었다. 가진 것도 없고 행선지는 없었으나, 사지 멀쩡한 몸만 있으면 되었다. 배가 고프면 보이는 대로 잡아먹고, 잠이 오면 그 자리에서 누워 자면 그만. 소녀에겐 향후 어떠한 계획조차 필요치 않았다. 계절이 바뀌기를 수십 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려갔고, 세월은 변해만 갔다. 그렇게 오랜 세월 떠돌이 생활을 하던 소녀는 여행 중이던 어느 한 고승을 만나게 되었다. * 「야마타노오로치의 피를 이은 아이로고.」 소녀를 만난 고승이 처음으로 했던 말이었다. 고승은 소녀를 대요괴로 악명을 떨쳤던 그 저주받은 존재의 피를 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야마타노오로치가 내 아비라도 된다는 거야?」 「정확히는 아니지만, 비슷하지.」 오늘 처음 만난 중에게 들은 소리가 다름 아닌 자신의 출생에 관한 것이라니, 그것도 야마타노오로치가 관계된 것이었다. 뜬금없기로서니 이만한 것도 없었다. 소녀는 어처구니없어 할 법도 했지만, 오히려 중의 말이 사실인 것인 양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소녀 자신도 짚이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담, 난 대체 누구라는 거야?」 「글쎄. 그 대요괴의 피를 이었다면 재앙의 씨앗이라고 해야겠지.」 「내가?」 「그래. 너에게 그 대요괴의 기운이 느껴져.」 으음. 소녀는 팔짱을 끼고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자신이 그런 기운을 발산한단 말인가? 뭔가 얼렁뚱땅 지어낸 말 같았지만, 저 중놈이 거짓을 고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중놈이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했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으나, 중놈의 얘기가 완전히 헛소리라 치부하지 않은 소녀는 생각을 잠시 정리하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면, 난 엄청 무서운 요괴라는 말이 될 텐데?」 「무서운 정도가 아니겠지. 무려 그 대요괴의 자식이니까.」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고승은 전혀 겁먹어 하지 않았다.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했으며 내뱉은 말의 어조는 잔잔한 호수처럼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거짓을 했다는 게 아니었다. 야마타노오로치의 피를 이었고, 재앙의 씨앗이라곤 하나 그것이 꼭 두려워해야 할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것은 소녀를 보고 바로 안 사실이었다. 「하지만, 너는 야마타노오로치와는 닮지 않은 것 같군.」 닮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야마토 전국을 공포로 휩싸이게 만들었던 그 대재앙의 피를 이었다고 한다면 어린 자식이라 할지라도 사악한 존재 여야 했다. 헌데 저 소녀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 다는 것이었다. 몸에서 흘려 나오는 사이한 기운으로 보아, 소녀는 틀림없이 그 야마타노오로치의 피를 요물이었다. 그런데도 소녀에게서 받은 인상은 사악한 요물이라기 보단 인정을 갈구하는 외로운 소녀가 아닌가. 고승은 이어 말했다. 「재앙의 씨앗이긴 하나, 그 씨앗이 싹을 튼 것이 아니로다.」 「무슨 소리야?」 「나를 따라서 수행을 한다면 재앙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소녀의 눈썹이 팔자가 되었다. 저 중놈은 자신 더러 자기와 같은 중이 되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요괴가 불법을 받들어 수행을 하는 것은 영 없는 일이 아니지만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얘기였다.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 지금처럼 기회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수락할 이유 따윈 없으니 말이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날 그쪽으로 끌어들이는 속셈이었구먼.」 불가에 입문 할 것을 권해오는 중에게 소녀는 빈정대는 어투로 쏘아붙였다. 뭐가 재앙의 씨앗인가? 그저 자신을 그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다 붙인 말이지 않은가. 소녀는 잠시라도 중놈의 말을 믿은 것을 후회하며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널 따라 수행 같은 걸 했다간, 고기도 못 먹고 머리도 빡빡 밀어야 하잖아!」 소녀가 중놈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화를 낸 이유란 역시 이것이었다. 중이 된다는 것은 불교의 교리에 따라 금해야 하는 것도 많으며 맘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그건 소녀에게 있어 죽으라는 소리와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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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녀를 위해 존재하는 절. 명련사!
그라데이션 투톤 헤어의 주지승에 개성적인 차림의 요괴들이 넘쳐나는 그곳은 완전 개꿀임.
불가에 귀의 했다는데 고기를 씹고 뜯고 이가탄탄, 반야탕으로 밤새 꼬장 부려도 되는 곳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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