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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그의 파문 선언에 유카리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파문을 꺼내든 스승과 이제 파문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제자의 모습을 살피며 조용히 눈치를 봤다. 잠깐의 적막함이 흐른다.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서인지 다소 엄중한 공기마저 느껴졌다. 그 적막을 깨트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스이카였다. 「이제 전 제자가 아니라는 거네요.」 스승이 내린 파문에 대해 충격을 받거나 우울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 결정을 번복하도록 매달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아쉬워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스이카의 모습은 일반적 상식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 스이카인 만큼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상식 밖의 발언을 이어갔다. 「이야~, 이제 내 멋대로 하고 다녀도 된다는 거네! 형님. 그 동안 수고 많았어.」 침울해져 있어도 모자랄 판국인데 오히려 쾌재를 부르며 방금까지 스승이었던 기예유를 스승에서 형님이라는 호칭으로 바꿔 부르는 스이카의 태도는 기예유를 제외한 둘을 경악시키기 충분했다. 해방감을 여실 없이 드려난 그녀의 얼굴은 기쁘다 못해 승천이라도 해 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눈살을 찌푸린 기예유가 짜증이 팍팍 묻어나오는 어투로 맞받아쳤다. 「그래. 이 못난 오니년아! 나도 너 같은 꼴통을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속이 다 후련하구나.」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어쩌다 제자로 삼은 년이긴 하지만, 그 재능이 출중해 지금까지 계속 참아온 것이었다. 허나, 단순히 술법이 아닌 자신과 사상을 공유할 진짜 제자를 구하게 되었는데 더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파문까지 해버린 건 심하다 싶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유카리가 제자로 들어오지 않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이카와 유카리. 둘 중에 한 명만 제자로 삼을 수 있다면 그 답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기예유님. 파문을 시킬 것 까지는..」 「저 오니가 네 선배 노릇을 해도?」 작게 벌려진 유카리의 입 안으로 부터 「아 ─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파문은 심했다고 생각해서 물어 본 질문이었는데, 도중에 말을 끊고 들려준 기예유의 대답은 그녀로서 격하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예유는 그런 유카리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제자와는 오늘부로 헤어질 생각이었다.」 갑작스러운 발언이었으나 제자였던 스이카는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기예유의 말에 부연을 더했다. 「처음부터 저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온 거니까. 이제 목적 달성했으니 여기에 더 머물 이유가 없다 이거죠.」 「그런 관계로 이제 내 제자가 된 유카리는 나를 따라 대륙으로 가줘야겠다.」 서로 호흡을 맞춘 듯한 둘의 말은 유카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카리는 선 듯 대답을 들려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직 제자가 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같이 대륙으로 가자니.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다. 「저는..」 「당장은 아니야. 먼저 대륙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앞으로 십 년 안에 날 찾아오도록 하 거라. 곤륜산에 도력왕이라면 모르는 이 없으니. 오는 길은 어렵지 않을 거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눈치였기에 기예유는 유카리의 결정을 대신 내 버렸다. 그리고 유카리는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달고 순순히 그의 결정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대륙이라면 섬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땅이긴 하나 문제는 없었다. 「곤륜산에 도력왕이라.. 알겠어요. 제 능력이라면 쉬운 일이죠.」 거리와 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순식간에 이동하는 틈새가 있으니, 대륙의 넓음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자신의 발이 닫지 않는 곳이 존재했다. 「하지만, 곤륜산은 서왕모가 살았다는 영산.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 됩니다만..」 그 장소가 천신과 관계 깊은 신성한 땅일 경우, 허락 없이 침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유카리는 곤륜산이 그런 장소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 물음에 기예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영산이긴 하나 요괴들이 넘쳐나는 곳일세. 오히려 요괴의 산이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기예유는 말하던 도중 으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대륙에서 대단한 놈들이 죄다 모여 있는 곳이란 말이다. 그 중에서 내가 단연 으뜸이지!」
말을 마친 기예유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방금 그가 한 말은 즉, 나는 최고로 대단한 놈이라고 하는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자화자찬이었다.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슈?」 바로 스이카의 야유가 이어졌다. 그 옆에서는 유이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으로 스이카의 의견에 공감의 의사를 내비쳤고, 유카리 까지 영 좋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똑 같았다. 그 뭐냐.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이 행동하는 어른을 보며 나는 커서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반면교사를 보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기예유는 경솔히 내뱉었던 자화자찬에 후회막급 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을 구제불능으로 보는 듯한 저 눈들이 견딜 수 없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을 만큼 있기 힘들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서면 더 한심해 질뿐이다. 기예유는 자화자찬 했던 부분은 없었던 일로 돌리고 하던 얘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그곳은 여러 존재들이 공존해 있는 장소인 만큼. 신들이나 현자들의 협조를 구하기도 그만큼 쉽다네. 난 거길 거점 삼아 앞으로 풀어 나가야할 중대한 문제를 논의 할 커다란 회의를 열 생각이다.」 아까 식은땀을 흘리며 절절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현자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예유를 보는 모두의 생각은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얼버무렸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저 대단한 현자님은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함이 넘쳐났다. 아마 자신이었다면 그런 창피한 말을 내뱉은 직후, 태연하게 있지 못했으리라. 그런 그에게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바로 야쿠모 유카리라는 여자의 미색이었으니, 희극이 따로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예유는 해야 할 말을 전부 마치고는 스이카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전했다. 「앞으로 조금 바빠질 것 같으니. 난 이만,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구나.」 그 작별 통보에 파문을 당해놓고도 얼씨구나 해방감에 쾌재를 불렸던 스이카는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제 가는 거예요? 뭔가 시원섭섭하구먼요.」 「맘에 없는 소리 하지마라. 실은 좋아 죽는 주제에.」 「아, 들켰다. 헤헤!」 기예유는 유카리에게 시선을 돌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기다리고 있으마.」 「네. 되도록 빨리 찾아가 뵙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퇴마사 남자... 뭐 상관없나. 유이치는 무시한 채 그 자리에서 퇴장하려고 했는데 「잠깐!」하고 기예유를 붙잡는 외침이 들려왔다. 「살아남은 캇파들의 처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오늘을 기해 캇파성애자가 되어버린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유이치는 기예유가 사라지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해 해결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캇파들의 생존권 보장. 그가 이대로 가버린다면 유카리가 다시 몰살시키려 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였다. 기예유는 그런 유이치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유카리에게 긴히 일러두기로 했다. 「유카리. 생존한 캇파들 전부 야츠가타케에 살고 있는 캇파 무리에 편입 시키도록 하게.」 「네.」 살아남은 캇파를 야츠가타케의 캇파에게로 보낸다. 유카리는 기예유의 부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바로 눈치 채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군말 없이 수긍했다. 야츠가타케는 텐구들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곳이고 그곳의 캇파들은 예외 없이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영악함을 타고난 사사산의 캇파들을 거기로 보낸다는 것은 살려두는 대신, 텐구들로 하여금 캇파의 감시를 하도록 만들라는 지시였다. 이거라면 유카리 자신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대안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콧대 높은 텐구들은 되도록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것 정도였다. 특히 야츠가타케의 텐구들이라면 더 더욱 그랬다. 그들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지나치게 고지식했다. 대신, 그에 비례하여 구슬리기 쉽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해도 좋았다. 기예유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유카리는 화사하게 웃었다. 산 능선 너머에서 불어 온 산들바람이 그녀의 몸을 스쳐 기예유의 뺨을 훑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유카리의 몸에서부터 풍겨오는 꽃향기 냄새였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닮은 자양화(紫陽花) 냄새. 보랏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꽃이었다. 기예유는 안심을 한 유이치의 얼굴을 살피는 것을 끝으로 그 자리에서 땅을 박차고는 허공에 동화 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남은 자들은 기예유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다보며 저마다 그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남겼다. 「칫, 그렇게 서둘러 떠날 필요는 없는데..」 「어쩌면 속 썩이는 오니로부터 일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죠.」 스이카는 이 자리를 빌려 모두 다함께 술자리나 거나하게 즐겼으면 싶었다. 그러나 스승은 그럴 틈도 없이 급히 떠나갔고, 유카리는 그 이유를 오니 탓으로 돌렸다. 「조금 아쉽게 되었군. 그와 좀 더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유이치는 기예유라는 신비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것만 같아 아쉬움만 토로했다. 그만한 인물을 또 어디서 만나겠는가. 앞으로는 없을 기회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꿩 대신 닭이라..」 기예유 만큼은 아니더라도 슈텐이라는 오니와 유카리라는 요괴는 얼마나 거대한 신비던가. 전멸로 끝나버린 캇파 토벌전도 전부 저 유카리라는 여자가 영주를 뒤에서 조종해서 일으킨 계획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슈텐은 너무 유명하니 설명도 필요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거물들 사이에 끼여 있는 건지, 실감이 가질 않았다. 아직 살아있다는 거 자체가 기적일 것이다. 입으로 중얼거리긴 했지만, 절대 꿩 대신 닭이 아니었다. 용 대신 봉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린 유이치는 피부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곤 그제야 겨우 실감이 가는 것이었다. 「그럼, 저도 이만 헤어지겠어요.」 「뭐? 섭섭하게 왜 그래? 좀 더 있다 가면 좋을 텐데.」 「아뇨. 지금이라도 저 캇파들을 야츠가타케로 인솔해야 되거든요.」 기예유가 부탁한 일을 한시 빨리 처리해야 했기에 유카리는 허공에 선을 그어 공간을 가르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남겨진 것은 스이카와 유이치. 오니 한명과 인간 한명이었다. 유카리의 신출귀몰함에 얼이 빠진 얼굴을 한 유이치에게 스이카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넌 급하게 갈데없는 거지?」 「그래. 급하게 가려고 해도 몸이 아파 걷지도 못하겠다.」 「크크. 하긴 넌 그 상태론 산짐승들 밥 밖에 안 될 테지.」 스이카가 웃으며 한 말은 틀린 소리가 아니다. 멀쩡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사실 그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부터가 보통의 인간으로서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니에 말에 수긍하며 씨익 웃는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했다. 핏기가 싹 가셔진 그의 피부는 산 사람 이라기보다는 죽은 시체에 가까웠으니. 스이카는 그가 어쩌면 이미 죽어버린 망자일 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었다. 「너. 살아있는 거 맞나?」 「그럼 내가 죽은 걸로 보이나..?」 「응. 누가 보면 망령으로 착각 할 정도야.」 「심각하군.. 하하.」 스이카는 솔직한 감상을 들려줬고, 그에 유이치는 작은 소리로 웃었다. '망령이라..'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떠한 몰골일지 어렴풋이 상상이 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대로 진짜 망령이 되어버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까지 들었다. 조금 우습긴 하나, 진심이었다. 생각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 그는 일단,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기에 체면 사나움에도 불구하고 스이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미안하지만, 가까운 마을 까지 동행해 주지 않겠나?」 「상관없어. 나도 그럴 생각이었으니.」 스이카는 그의 부탁을 쉽게 수용하고는 도리어 자신이 원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길 「이참에 진짜로 네 경호원이나 되어 볼까?」 하는 장난기 섞인 어조지만, 유이치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가 빈말로 넘겨들었던 경호원 제안이 현실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 제안에 유이치는 무언가에 홀린 마냥 저도 모르게 「어..」하고 수긍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에 스이카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크하하. 잘 말했어. 그럼, 슬슬 산을 내려가 볼까?」 이렇게 해서 슈텐이라는 대요괴를 경호원으로 삼아버린 괴짜 퇴마사가 탄생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걷기도 힘들어 스이카에게 엎혀서 내려가는 유이치의 얼굴은 묘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 엉뚱하다 못해 기절초풍을 할 만한 관계가 되어버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아했다. 왜냐하면 소노하라 유이치란 인물은 퇴마사 이전에 아주 지독한 괴짜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스이카에게 이상한 놈이라 불릴 만한 사내였다. * 「내친 김에 친구 사이가 되지 않을래?」 「마음대로 해. 어찌됐던 상관없으니까.」 「크크크. 알았어. 이상한 놈.」 「내 이름은 이상한 놈이 아니야. 소노하라 유이치다.」 「알았어. 그럼 나도 슈텐 말고, 스이카라고 불려주지 않을래?」 「그 스승이 널 부를 때 쓰던 호칭 말이냐?」 「그래. 슈텐은 귀엽지가 않거든!」 「오니 주제에 귀여운 걸 신경 쓰는구나.」 살갑게 말을 거는 스이카와 투덜대면서도 싫은 기색이 없는 유이치. 산을 다 내려왔을 때의 두 인요는 서로 허물이 없을 만치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한편, 유카리가 인솔한 캇파 생존자들은 노무라, 세키세이, 카와시로. 모두 세 가문으로 그들은 유카리의 집요한 설득 끝에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무기 제조를 앞으로도 엄격히 금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야츠가타케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의 캇파들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꽃향기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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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꽃향기 에피소드 완결입니다.
다음 에피소드 부턴 상당히 경파한 분위기로 갈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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