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파란색을 띤 붓꽃더미 숲. 그 숲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 이곳저곳 조잡해보였지만, 오직 붓꽃으로만 만들어진 숲은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작은 파란 숲의 한 가운데엔 그림자 세 개가 조용히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숲은 조용했으며, 그들의 분위기는 섣불리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엄숙했다. 눈을 감고 있던 세 명 중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사계절의 플라워 마스터라고 불리는 카자미 유카였다. 유카는 이마에서 턱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슬쩍 닦아낸 후 말했다.
“이세계의 붓꽃들을 잠시 이곳으로 불러왔어. 사계절 속에서 억지로 불러낸 꽃들이라 이곳은 오래 가지 않아. 인사만 나누고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유카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양산을 활짝 피었다. 양산은 유카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그렇게 유카를 밖으로 배웅했다.
“아, 사례금 잊지마. 곧 모종을 살 때거든.”
“걱정마세요~”
유카의 확답을 바라는 질문과 함께 들린 것은 물이 흐르는 것 같이 청량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낸 사람의 이름은 사선 곽 청아로, 하늘하늘 거리는 옷과 날개옷이 매우 인상적인 여인이다. 청아는 떠나가는 유카를 향해 얄밉게 손짓했다. 얼른 가라는 축객령이 떨어진 것이다. 유카의 그림자는 그런 청아의 축객령에 보답하듯 사라졌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강시의 장례를 준비할 필요가 있소?”
의아하다는 듯 말을 꺼낸 사람은 고운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사내의 기백이 드는 사내였다. 머리카락은 마치 두 귀의 짐승처럼 뻗어있었고, 가냘픈 몸엔 화려한 비단이 수놓아진 드레스와 함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도교를 따르는 일파의 우두머리인 토요사토미미노 미코였다.
“어머, 비록 요시카를 제가 방패 및 노예로 쓰긴 했지만 요시카는 태자님 이전부터 만나온 지인과 다름없어요? 응당 주인이라면 노예의 장례식을 이렇게 멋들여지게 해줄 필요가 있을 거예요. 만약 후토나 토지코가 소멸한다면, 태자님은 이것보다 훨씬 공을 들여서 장례를 취할 것 같은데 말이죠.”
“아니,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아가 이렇게 그 강시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는 딱히 알지 못 했소.”
“흐흥.”
청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살짝 날개옷을 흔들었다. 미코는 붓꽃 더미 속에서 조용히 잠든 요시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전, 아니 죽었던 이후에도 입었던 옷은 모두 불길 속에 태워버렸다. 요시카에게 남은 것은 하얀 몸뚱아리와 청아가 붙여둔 노란 부적 하나 뿐이었다. 몸 이곳저곳에 억지로 실로 꿰매어진 상처가 보였다. 생전의 요시카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사후까지 청아의 손바닥 안에서 놀려진 것이다. 그렇지만 부적 속에서 잠든 요시카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해보였다.
“아아, 아름답구나. 요시카 넌 참 좋은 강시였어. 주인의 말도 잘 따르고, 항상 강시 특유의 기운이 넘치던 그런 아이. 강시가 된 이후에도 매우 연약해서 이곳저곳 상처를 많이 입었지만, 그래도 넌 훌륭한 강시였어.”
청아가 요시카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미코는 멀찍이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주종 관계로 이루어진 그들의 마지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요시카를 향해 청아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미코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바람에 흔들거리는 날개옷으로 장식된 청아의 등을 멀찍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이제 가요, 태자님. 요시카는 저 세상 속에서도 행복할 거예요.”
“죽은 후에도 정신을 현세에 저당 잡혔다고, 염마에게 구박이나 받지 않을까요.”
“아뇨, 아뇨. 분명 요시카는 그런 염마님까지 녹일 거예요.”
눈물을 바란 것까진 아니지만, 청아의 모습은 너무나도 멀쩡해보였다. 미코는 뭘 기대한 걸까, 싶어서 잔뜩 힘을 주었던 어깨에 힘을 빼고 말았다.
“태자님도 인사 나누실래요? 요시카랑.”
“아, 아뇨. 저와 그녀는 생전에 친한 것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미코는 요시카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까와는 뭔가 달라진 게 있었다.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태자님?”
“아…. 갑시다. 다시 대사묘로.”
무언가 잘못 본 것이겠지 싶어서 미코는 눈을 살짝 비빈 후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바라 본 붓꽃 더미로 이루어진 숲은 미코의 눈엔 그저 불길하게만 보였다. 청아는 비녀에 달려있던 종을 살짝 울려보았다. 청량한 소리가 그들의 귀를 넘어 붓꽃 더미 숲을 감싸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바닥에 큰 구멍이 생기더니 붓꽃더미 숲은 모두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코는 그 구멍 속으로 오늘의 기억을 던져버렸다. 청아는 홀가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가만히 서있었다. 어느새 붓꽃더미는 거의 사라지고 구멍이 생겼던 땅 위로 붓꽃 잎 몇 개가 하늘하늘 흩날리고 있었다.
x x x
“기다리셨어요? 태자님?”
“아, 아닙니다.”
대사묘의 오후, 미코는 조용히 청아를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였다. 청아와 자신의 차를 준비하던 토지코가 신경 쓰인다는 듯 자신을 빤히 바라봤었다. 그렇지만 미코는 그 날 붓꽃더미 숲에서 받았던 눈빛의 이유를 풀어야만 답답한 속이 풀릴까 싶어서 청아를 불러 들였다. 분명 요시카는 그 때….
“태자님!”
“네, 넷!”
“절 이대로 기다리게 할 거예요? 전 이 세상에서 기다리는 게 제일 싫어요.”
청아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그런 청아의 어깨 뒤로는 새로운 강시가 서 있었다. 일전에 보았던 요시카와 같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넘치는 그런 아이였다.
“저 아이가 그….”
“아, 새로운 아이예요. 이름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요. 아마, 영원히 정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요시카는 특별한 아이였거든요.”
청아의 말에 미코는 다시 입속으로까지 침투했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주인을 의심하는 것은 미야코 요시카, 그녀로서도 나쁜 일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미코는 다시 용기를 내어 청아를 보며 말했다.
“일전에 당신의 이전 강시인 미야코 요시카의 장례식이 있었지요.”
“아, 요시카 말인가요.”
늘 힘이 잔뜩 들어갔던 청아의 어깨는 요시카의 이름이 귓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추욱 내려갔다. 그렇지만 미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겨우 저런 것으로 기가 죽었다면 자신의 몸속에 흘렀던 황족의 피가 분통을 참지 못하리라.
“청아, 지금은 사라진 붓꽃더미 숲에서 우린 같이 요시카의 장례를 치렀지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분명 모든 것을 내려두었던 요시카의 얼굴이 장례가 끝나자 아직 이승에 한이 남았다는 것처럼 눈이 번쩍 뜨여진 것을…. 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 눈을 바라보면 살짝 섬짓합니다. …청아는 왜 요시카가 그런 눈을 뜨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랬다. 요시카는 감았던 눈을 뜨고 있었다. 미코의 말은 요시카의 눈에 집중 되어 있었지만, 사실 미코는 묻고 싶었던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어째서 마지막까지 이마에 붙어있던 요시카의 부적이 사라지고 왠 하얀 종이가 그 자리를 대신했는지. 그리고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어째서 요시카의 입에 붓꽃 더미를 몇 장 입안에 얹었는지를 말이다.
미코는 청아를 바라보았다. 청아는 웃는 낯 그대로 미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팽팽하게 서로의 줄을 당기고 있었다. 청아는 자신의 비녀를 빼서 이리저리 만지더니, 도발적으로 웃었다. 미코는 살짝 소름이 돋았지만,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봤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청아는 자신의 품에서 부적을 꺼내보였다. 청아의 뒤에 있던 강시에게 붙어있는 부적과는 다르게 매우 낡은 티가 났다. 청아는 탁자에 그 부적을 올리더니, 자신의 강시를 데리고 미코의 거처를 떠나갔다. 복도 너머로 청아의 웃음소리가 요사스럽게 흩날렸다. 남은 미코는 몇 분이 지나서야 청아가 남긴 부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앞면은 보통 부적과 다를게 없었지만, 주인의 명령을 적어두는 뒷면은 붉은 색으로 깊게 적혀 있었다.
‘不動(부동)’
“하핫….”
모든 사실을 깨달은 미코의 헛웃음 소리만이 거처 속에서 넘실넘실 떠다녔을 뿐이다. 그 웃음소리는 복도 너머로 흩날리던 청아의 웃음소리와 함께 엉켜져버리고 말았다.
x x x
어머, 깨버렸구나. 요시카.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아서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네. 불쌍한 요시카.
미안, 요시카. 네 몸은 낡을 대로 낡아빠져서 이제 난 새로운 강시를 원해. 그러니 이젠 널 놓아줄게. 그러니 이젠 잘 죽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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