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기억하니? 내가 처음 너를 주워왔을때 넌 굉장히 혼란스러워 했어.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눈빛은 떨리고, 담요를 덮어주려는 나의 손을 불안함에 뿌리치고 말았지. 그런 막연한 의심에 찌들어 먹기를 거부하는 입술이 가련하면서도 원망스러웠기에, 그리고 그런 모습마저도 믿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서 차마 바라만 보고 있을 순 없었어. 그래서 그저 맹목적인 사랑을 보낼 수 밖에. 그래, 이런걸 아가페... 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난 단지 너를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받는것 같으니까. 하지만 네가 오고 처음 며칠은, 아가페라는 이름을 붙여도 괜찮았을거 같아. 너는 늘상 사납기 그지없었고 나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먹으라고 나둔 식사와 물은 방 여기저기 내팽개치고, 집안 이리저리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뒤집어놓고, 심지어 문고리가 망가질 정도로 빠져나가고 싶었을 줄은. 고양이란 생물은 원체 죄다 이런거였는지, 솔직히 의외였어. 난 네가 혼란스러워 할 뿐 나와 같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있잖아, 그러니까 대답해줘.
"다녀왔어."
항상 네가 말해왔던 것처럼 말이야.
"얌전히 있었니?"
비봉구락부는, 둘이서 하나.
"렌코."
...그렇지?
04.
"어머, 또 불을 꺼놓다니..."
분명 집을 나설때마다 불이란 불은 다 키고 나가는데, 어째서 항상 돌아와보면 어두컴컴히 윤곽만 흐릿하게 보이는건지. 활달한 너의 성격으로 미루어볼때 넌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는 아니지만, 혼자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건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잖니. 나도 경계를 찾아 밤길의 신사를 찾아갈땐, 꼭 네가 곁에 있어줬기에 즐거울 수 있었어.
그래, 널 주워온 날은 특히.
딸깍─
"...렌코, 또 밥을 먹지 않았구나."
이리저리 널부러진 음식물과 나뒹구는 물컵과 엎어진 물, 바닥을 어지럽게 수놓은 옷가지, 그리고 방 구석에 앉아 꺼질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너. 혹시 방을 어지럽힌걸 들키기 싫어서 불을 꺼놓은걸까? 후후, 이런 잔망스러운 장난을 쳐놓은 너는 여전히 사랑스럽구나. 정말로, 모든게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요 며칠 잠잠하다 싶었는데 어째서 다시 예민해진건지, 투약량을 줄인건 나쁜 생각이었나보네.
"렌코도 참, 제때 밥을 먹지 않으면 건강에 나쁘잖니. 금방 식사를 차려줄테니 기다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쓰러져 눈길도 주지 않는 너였지만, 나는 서글픈 생각따윈 전혀 들지 않아. 너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은 나에겐 행복에 겨워서, 설령 네가 아무리 나를 상처준다고 한들 그 아픔을 달게 받을 자신도 있어. 물론 너는 상냥한 아이니까, 나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있지만. 게다가 넌 나를 무시하는게 아니라,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조금 생각이 많아진 것일 뿐이야. 그게 당연하잖아? 내가 렌코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해 마지않을테니까.
"들어봐 렌코. 오늘 재밌는 일이 있었어."
우리의 첫만남을 기억하고 있겠지, 렌코. 수속을 마치고 학부건물을 빠져나와 캠퍼스를 구경하던 나를 잡아세운 페도라의 단발머리소녀는, 단지 이나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외모를 하고있다는 이유로 어째선지 나에겐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호객행위같은 말과 함께 다가왔어. 이세계의 비밀이 어떻다는 둥, 숨겨진 진실이 어떻다는 둥 많이 생각해본듯 멋들어진 말을 늘어놓았지만, 당시 난 입국한지 얼마 안된 참이라 네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히 서있는 내 모습에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걸 느껴 멋쩍게 미소를 짓는 너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픽 웃어버리고 말았어.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기적과도 순간이 아니었을까. 네 이름조차 몰랐었지만 너와 함께라면 어쩐지 즐거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네 손을 잡았던건데, 지금까지 이렇게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었잖아. 어때, 렌코. 내가 그 기적같던 순간을 잊을리가 없는 것처럼, 너에게도 분명 기적과 같았을은 순간이었겠지?
"요즘 네가 하루종일 집에만 있다보니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고양이를 기르는 친구에게 도움을 받았어."
너도 잘 알고 있듯이 나는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기가 어려운 성격이야. 거듭 말하지만 그때 네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외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그런 내가 오늘은 용기를 내어 처음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봤어. 하루노씨라고, 우리 학부 사람이라 렌코는 잘 모를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지나가는 말로는 고양이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 들어서, 너를 위해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어. 친절하기 그지없는 하루노씨는 예방접종을 꼭 해주라고 했지만, 너는 그다지 그럴 필요가 없을 거 같아. 주사라면 매일 내가 놓아주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녀는 친절하긴 했지만, 상대와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라 조금 거리를 둬야할지도 모르겠어. 물론 볼일이 끝난 후 그녀와 고양이에 대해 대화를 하는건 즐거웠지. 자기가 기르는 얘들은 어떻다는 둥, 전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둥 듣기만해도 고양이들의 귀여움이 뿜어져 나오는 듯 현실감있는 이야기들이었을 뿐더러,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표정은 굉장히 행복해보였어. 맞아, 그녀가 기르는 고양이의 사진도 봤어. 그녀의 배위에 올라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이든 아이, 그녀의 다리를 끌어안고 매달리고 있는 아이, 사진을 찍던 말던 방 구석에서 털을 관리하는 아이. 정말 귀엽기 그지없어서, 나도 그녀처럼 너의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질 정도였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겠지. 렌코, 혹시 넌 내가 다른사람과 친해지는걸 어떻게 생각하니? 질투를 느낀다거나, 막연하게 불안하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널 독차지하는 것처럼 너도 날 독차지하는걸 바라고 있는걸까?
...미안 렌코. 내가 경솔했네. 그녀를 만나는건 앞으로 자중하도록 할게.
내가 인정하는 것만, 그 이외는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네가 인정하는 것만, 그 이외는 용서하지 못하겠지.
분명 그럴거야. 비봉구락부는 둘이서 하나니까.
05.
"자, 렌코. 선물이야."
발치앞까지 다가온 나에겐 눈길하나 주지 않으면서 선물이라는 한마디에 고개를 올리다니, 아이처럼 눈을 빛내줬더라면 더 좋았을테지만 그래도 네가 나를 봐주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이거, 너한테 딱 어울릴 거 같아서 사왔어. 매줄테니 잠시만 기다려."
내가 말했잖니, 렌코. 밥을 제때제때 챙겨먹지 않으니 똑바로 앉을 힘도 없잖아 정말. 팔뚝도 우리집에 오기 전보다 훨씬 가늘어진데다가 예전보다 셔츠도 훨씬 헐렁헐렁해보이고. 이렇게 마른 너도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네가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니까 부탁하는거야, 렌코. 밥은 거르지 말아줘.
"...메리."
목걸이를 매는 손에 얹어지는 너의 손이 가볍기 그지없어서, 네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착각이라고 느꼈을거야. 얼마만일까,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첫날은 귀가 녹아버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잊을만하면 내 이름을 불러주더니, 다음 날 부터는 좀처럼 그 빈도가 줄어들었지. 아니아니, 영양제를 놓아준 다음부터였던가? 아무튼, 네가 다시 나를 불러줘서 정말 기뻐.
"응, 렌코?"
네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하루종일, 세끼를 거르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즐거워. 하지만 너는 좀처럼 눈을 맞춰주지 않아서 가끔은, 정말로 가끔은 네가 미워지는 순간도 있어. 그런데 이렇게 네가 먼저 눈을 마주쳐오다니, 이렇게 기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렇게 너와 눈을 맞대는것은, 그것도 입김이 볼에 닿을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아마 꽤 오랜만이지 않을까 싶어.
그보다 렌코, 다크써클이 좀 심해졌네.
"이제, 그만둬줘."
축 늘어진 눈꼬리와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한 눈빛, 그리고 메마른 입술새로 흘러나오는 새된 목소리가 너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찌보면 굉장히 어울려. 너는 언제나 밝고, 명량하고, 나의 등대와도 같은 아이였지만 이렇게 퇴폐적인 상황에서도 너의 매력은 빛을 발하고 있잖아. 이 어찌 사랑스러운 모습인지, 배덕감이란게 무엇인지 알거같아.
철컥─
"자, 다됐어."
...렌코, 사진 한장만 찍어도 될까?
이건, 이건 너무 사랑스러워! 단지 목걸이를 하나 채웠을 뿐인데 이렇게나 귀여워질 수 있다니, 역시 렌코야! 하루노씨가 고양이들 사진을 찍어놓고 다니는 이유를 이제는 알것만 같아. 힘이 들때마다 지금 네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그 괴로움을 잊을 수 있을게 분명해.
조금만 기다려줘, 렌코. 카메라를 가지고 올게.
메리의 정신병자스러운 면모를 조금더 나타내고 싶었는데 제가 정신병이 없어서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습니다.
3편은 롤챔스 보고와서 안졸리면 적당히 쓰고, 만약 졸린다면 내일 일어나서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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