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가웠고 눈이 내렸다.
죽림의 나뭇잎들은 모두 소복히 내린 눈 아래 조용히 기척을 죽였다. 메마른 바람은 대나무를 흔들고 지나가며 소리를 내지만, 가을과 같이 쓸쓸한 속삭힘도 이젠 들어 볼 수 없다. 이제 완전한 죽음이 이 미혹의 죽림에 온것이고, 그것은 지금 영원정 주위를 헤매이고 있는 것이다.
이나바들은 영원정에 불을 넣고 모시는 귀인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서 동분서주 달리고 있었지만, 많은 이들의 보살핌을 받고 고생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공주님은 애석하게도 그녀의 방안에 있지 않았다. 아직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첫눈은 아니기에 눈에 마음이 설레여 밖으로 이끌려 질 때는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거의 열번 중에 여덟번은 그녀의 원수인 모코우와 싸우고 돌아오곤 했다. 카구야는 끔찍한 몰골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되면 이나바들의 잡일 거리가 느는 셈이된다. 영원정엔 온천이 없어서 연료로 목욕물을 데워야했기 때문이다.
"카구야는 또 어디로 갔을까."
집안일을 하다가 문득 개구쟁이 아들을 떠올리는 주부처럼, 에이린은 서류철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눈이 오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은 해가 짧다. 아무리 카구야가 강하다 하더라도 그녀의 안위는 자신이 지키겠노라고 달에서부터 이어진 맹세는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발동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길을 나서기로 했다.
"우동게. 잠시 이 서류좀 정리해 주겠어?"
에이린은 수행원처럼 곁에 붙어있는 달의 이나바에게 자신의 일을 부탁하고 일어났다.
눈속에서 걷기 위해 우산과 동복을 입는다.
"공주님이 걱정되시는 거죠? 300년이나 계속된 일이지만 공주님도 사부님도 여전하시네요."
"그렇겠지. 이젠 부질 없다는 걸 누구나 다 알테지만 말이다."
우동게는 에이린의 자리에 앉아 능숙한 솜씨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300년이나 된 일이다 보니 그녀도 이제 에이린만큼의 정리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오랜 시간 속에서 반복된 일인 것이다.
"그럼 잠시 다녀오마. 테위에게 어쩌면 물을 데울 연료가 필요하다고 일러두거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펄럭.
우산이 펼쳐진다. 영원정의 마루는 이미 반쯤 눈에 잠겨있었다. 에이린은 털신과 장갑을 신었다. 함박눈이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씨는 시야가 나빠서 월인인 에이린이라고 해도 카구야를 찾는 건 무리일 것 같기도 하다. 무리일 것 같기도 하다고 해서 찾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음. 이런 날씨로 하늘을 나는 것도 힘들겠네."
"공주님을 찾아가는 건가 우사."
"테위."
눈밭을 맨발로 가로지르며 테위는 마루에 올라선다.
"걸어도 상관없이 바로 찾을 거야. 오늘은 연료가 없더라고 우사."
"모코우와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던 건가?"
모든 상황에서 적절한 행운을 부여하는 정도의 능력을 반대로 해석하면 그럴 수고 있다.
"내 능력은 예지가 아냐 우사. 어쩌면 한동안 돌아오지 않기때문에 그럴수도 있어. 생각보다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몰라 우사."
테위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마루에 쌓인 눈을 뭉쳤다.
"이걸로 레이센을 놀려먹는 건 충분하겠지 우사!"
테위는 안쪽 에이린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서류는 안젖게 조심해."
"걱정말라고 우사 하하하!"
"적어도 오늘은 집에 얌전히 있었으면 했지만."
에이린은 정문을 나섰다. 이렇게 되면 직접 걸어다니며 찾을 수 밖에 없다.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마음속 어딘가에선 걱정말라며 웃는 얼굴이 걸리기도 한다. 달에 있을 때의 카구야의 웃음.
"……."
얼굴이 잠시 굳어진다. 역시 안심할 수 없다. 뽀득뽀득 걸음마다 눈이 밟히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죽림엔 정해진 길이 없다. 한동안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불확실함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다.
'카구야는 안그래도 자주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지.'
'그렇다면 어딘가 정해진 장소가 있어서 그곳에 있는 걸지도 몰라.'
언젠가 분재로 가꾸었던 나무의 열매를 가지고 나간 적이 있다. 영원정 밖에 심어보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 일을 기억해낸 에링은 차분히 방향을 추측하면서 계속 걷는다. 그 열매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지고 가던 중에 모코우와 조우하고 혈전을 벌이면서 불타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가는 길이 정확한 지 알 수도 없다. 자신은 카구야가 지나간 길과 정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불확실함 때문에 멈출 수는 없었다.
자신과 카구야가 어떤 기분으로 봉래약을 먹었을까. 그건 어떤 확실한 답이나 변화를 부르는 일이었기때문에 먹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어떤 작은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작은 가능성을 위해서 카구야는 소홀히 불로불사를 손에 넣어버렸다. 그 정도의 사람. 그 정도의 인간인 것이다. 잠시 미궁에 헤매일지 언정 언젠가 나간다는 가능성을 약이 무한대로 확장시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먹은 것이다.
'이쪽으로 일단 계속 걷자.'
에링은 마음이 편해졌다. 일단 걷다보면 될 것이다. 일단. 어차피 자신이 걸어온 길의 발자국은 거세게 내리는 함박눈이 다 지워버렸다. 그래. 이렇게 걷다보면, 미혹의 죽림도 끝이 날 것이다. 카구야가 그 곳에 서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은 아주 작으나, 우리들의 영원은 그 작은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혀서 사실로 만들어 버릴테니까.
답은 나왔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흘렀다.
"공주님."
추위에 막힌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그래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에이린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 갔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우산 살이 잠시 대나무에 부딪히고 그바람에 꽤나 쌓인 눈의 반이 쓸려내려간다. 하지만 그 부스럭 거리는 소리는 작다. 알아차렸을 리가 없다.
아니. 알아차릴 소리였다. 그녀도 달의 주민. 이정도 작은 소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듣지 못했던 것은, 자기도 못말릴 정도의 호기심에 푹사로 잡혀서 어떤 일에 열중해 있다는 걸 뜻하겠지.
카구야는 자신의 열매가 만든 나무를 찾았다.
눈을 모아 자신의 하인을 만들었다. 눈을 걷고 댓잎을 주워 귀를, 자신이 되찾아낸 열매를 주워 눈을 만든다.
이나바들. 자신을 감당해주는 존재들을 말이다.
에이린은 멍하게 카구야의 등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다.
눈은 어느새 멈춰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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