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요괴의 산 안에서 과학도 노릇을 하는 니 토리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운수 좋은 날이었다. 취재에(오히려 미행에 가깝지만) 나간답시는 윗산 텐구님의 사진기를 고쳐다 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산 근처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초계인 듯한 백랑텐구의 천리경(千里鏡)까지 고쳐다 주기로 되었다.
첫번에 오이 셋, 둘째 번에 오이 다섯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풀뿌리 구경도 못한 니 토리는 온전한 오이 세 개, 또는 다섯 개가 툭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여덟 개라는 오이가 그녀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오이즙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도난당하는 발명품에 경보기 하나씩도 달아줄 수 있음이다.
그녀의 발명품이 어디론가 사라지기는 벌써 달포가 넘었다. 시리코다마도 못 구하기를 구하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물론방울 하나 달아 본 일이 없다. 구태여 달려면 못 달 바도 아니로되 그녀는 도둑이란 놈에게 방울을 주어 보내면 더 기술을 만들어 자꾸 온다는 자기의 신조(信條)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따라서 범인을 본 적은 있으나 어떤 녀석인지는 알 수 없으되 조용히 숨어 있다가, 사라지기는 게눈 감추듯 없어지걸 보면 고수는 고수인 듯. 절도가 이대도록 심해지기는 열흘 전에 값비싼 도구를 들고 내뺀 때문이다.
그때도 니 토리가 오랫동안 오이를 모아서 비싼 전동공구 하나와 오이 한 단 어치 시리코다마를 사다 놓았더니 니 토리의 말에 의지하면 그 오라질 년이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창문에 대고 날아왔다. 마음은 급하고 포장도 뜯지 않아 채 써보지도 못한 것을 그 오라질 년이 보자기는 고만두고 손으로 움켜서 모자에 짐짝 같은 혹이 불거지도록 누가빼앗을 듯이 처박질 하고 내빼더니만 그날 저녁부터 멀리서 두두두, 다다다다 하며 처음 들어보는 지랄맞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니 토리는 열화와 같이 성을 내며,
“에이, 오라질 년, 도벽은 할 수가 없어, 발명품 사라져, 도구도 사라져, 어쩌란 말이야! 왜 딴 데를 바루 털지 못해!”하고 니 토리는 책상의 모서리를 잘못 후려갈겼다. 때린 손은 보기엔 멀쩡하건만 금세 얼얼해왔다. 니 토리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하였다.
이 도둑이 그러고도 훔치는 데는 물리지 않았다. 사흘전부터 오이 보관고를 슬쩍하고 싶어하는 눈길을 느꼈다.
“이런 오라질 년! 도구도 훔친 년이 오이는, 또 훔쳐서 오이 농사를 짓게.”라고, 야단을 쳐보았건만, 못 지킬까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인제 경보기를 달을 수도 있다. 힘없는 주인 곁에서 없어질까 두려워하는 공구함(세 살먹이)에 추적기를 달아줄 수도 있다. – 오이 여덟 개을 손에 쥔 니 토리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땀과 빗물이 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기름주머니가 다 된 왜목 수건으로 닦으며, 그 천리경을 돌려주고 올 때였다. 뒤에서 <공순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자기를 불러 멈춘 이가 그 텐구 동료인 줄 니 토리는 한 번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텐구는 다짜고짜로, “소형 사진기 고치는데 오이몇 개요?”라고, 물었다.
아마도 그 텐구 자신의 염사 능력을 이용하여 신문을 발행하려 함이리라. 오늘 하기로 작정은 하였건만 비는 오고, 기계는 고장나있고 해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마침 니 토리를 보고 뛰어나왔음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왜 머리를 채 묶지 못해서 풀풀 휘날리며, 비록 <노기아> 제조사일망정 노박이로 건네주며 니토리를 뒤쫓아 나왔으랴.
“노기아 휴대용 캐머라 말씀입니까.”하고 니 토리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녀는 이 우중에 우장도 없이그 조그만 것을 끼긱거리고 고치기가 싫었음일까? 처음 것, 둘째 것으로 그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겁이 났음이다. 그리고 집을 나올 제 보관고의 모습이 마음에 켕기었다. - 윗산 텐구님한테서 부르러 왔을 그 먼지만 남아가는 집에 유일의 재물 같은 유달리 크고 움폭한 금고는 애걸하는 빛을 띠우며,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있어요.내가 이렇게 불안한데……’라고, 문을 걸그렁걸그렁 하며 애원하는 것 같았다.
그때에 니 토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별 빌어먹을 상상을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저걸 채울 줄 알아.”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금고를 붙잡을 듯이 뒤를 돌아보며, “나가지 말 수는 없지 그래, 그러면 일찌기 들어온다.”하고, 목메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소형기기까지 고쳐달란 말을 들은 순간에 경련적으로 떠는 손, 유달리 가득찬 속, 부서질 듯한 금고의 문이 니 토리의 눈앞에 어른어른하였다. “그래 노기아 고치는 데 오이 몇 개란 말이요?”하고 텐구는 초조한 듯이 공순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같이,“샤메이마루가 홍마관에 있고, 그 다음에는 새로 백옥루로 향하든가.”라고, 중얼거린다.
“열 다섯 개만 줍시요.” 이 말이 저도 모를 사이에 불쑥 니 토리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 입으로 부르고도 스스로 그 엄청난 오이 갯수에 놀래었다. 한꺼번에 이런 갯수를 불러라도 본 지가 그 얼마만인가! 그러자 그 오이 벌 용기가 금고에 대한 염려를 사르고 말았다. 설마 오늘 내로 어떠랴 싶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일 제이의 행운을 곱친 것보다도 오히려 갑절이 많은 이 행운을 놓칠 수 없다 하였다.
“열 다섯 개는 너무 과한데.” 이런 말을 하며 텐구는 고개를 기웃하였다.
“아니올시다. 품질로 치면 노기아가 다른 캐머라보다 갑절 이상 높답니다. 또 이런 진 날에 좀더 주셔야지요.”하고 빙글빙글 웃는 공순이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그러면 달라는 대로 줄터이니 빨리 고치요.” 관대한 어린 손님은 그런 말을 남기고 총총히 머리도 묶고 기사도 준비하러 갈 데로 갔다.
그 기계를 받아든 니 토리의 손은 이상하게 거뿐하였다. 기계를 고친다느니보다 거의 만드는 듯하였다. 도라이버도 어떻게 도는지 군다느니보다 마치 부품을 조립하는 <로보토> 모양으로 미끄러져도는 듯하였다. 비오는 날씨에 물이 떨어져 위태하기도 하였지만.
이윽고 고치는 이의 손은 무거워졌다. 도둑이 방문하는 때가 가까이 다다른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염려가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내가 이렇게 불안한데!> 이런 망상이 잉잉 그녀의 머리에 울렸다. 그리고 금고의 절그렁거리는 문이 원망하는 듯이 자기를 노리는 듯하였다. 그러자 쿠웅하고 떨어지는 공구함의 소리를 들은 듯싶다. 절걱절걱하고 문 여는 소리도 나는 듯싶다. “왜 이리우, 기사 놓치겠구먼.”하고 맡긴 이의 초조한 부르짖음이 간신히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언뜻 깨달으니 니 토리는 도라이버를 쥔 채 기기 한복판에서 엉거주춤 멈춰있지 않은가.
“예, 예.”하고, 김첨지는 또다시 공구질하였다. 시간이 차차 지나갈수록 니 토리의 손짓에는 다시금 신이 나기 시작하였다. 손가락를 재게 놀려야만 쉴새없이 자기의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근심과걱정을 잊을 듯이.
사진기까지 고쳐다주고 그 깜짝 놀란 오이 열 다섯 개를 정말 제 손에 쥠에, 제 말마따나 노기아나 되는 것을 비를 맞아 가며 끼릭거리며 고친 생각은 아니하고, 거저나 얻은 듯이 고마왔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제자식뻘밖에 안되는 어린 손님에게 몇 번 허리를 굽히며, “안녕히 다녀옵시요.”라고 깍듯이 재우쳤다.
그러나 무거운 가방을 들쳐매고 이 우중에 돌아갈 일이 꿈밖이었다. 노동으로 하여 모인 집중력이 풀어지자 굶주린 창자에서, 물 흐르는 옷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일 열 다섯 개란 오이가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 줄 절절히 느끼었다. 텐구의 거처를 떠나는 그녀의 발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젠장맞을 것! 이 비를 맞으며 가방을 매고 헉헉거리고 돌아를 간담. 이런 빌어먹을, 제 할미를 붙을 비가 왜 남의 상판을 딱딱 때려!”
그녀는 몹시 홧증을 내며 누구에게반항이나 하는 듯이 게걸거렸다. 그럴 즈음에 그녀의 머리엔 또 새로운 광명이 비쳤나니 그것은 <이러구 갈게 아니라 이 근처를 빙빙 돌며 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또 손님을 맞게 될는지도 몰라>란생각이었다. 오늘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한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하랴. 꼬리를 굴리는 행운이 꼭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내기를해도 좋을 만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요괴 산 요괴들의 등살이 무서우니 길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그녀는 이전에도 여러 번 해본일이라 바로 산길 앞에서 조금 떨어지게, 요괴 다니는 길과 사람 다니는 길 틈에 가방을 풀어놓고 자기는 그 근처를 빙빙 돌며 형세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얼마만에 누군가 지나갔고, 니 토리는 순식간에 그 이에게 날아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손님을 관찰하는 니 토리의 눈엔 땋은 머리에 검은 단화를 신고 <에이프론>까지 두른 어딘가의 시종인 듯, 칼잡이인 듯한 여편네의 모양이 띄었다. 그녀는 슬근슬근 그 여자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아씨, 시계 아니 고치시랍시요?”
그 메이드인지 뭔지가 한참은 매우 탯갈을 빼며 입술을 꼭 다문 채 니 토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니 토리는 구걸하는 거지나 무엇같이 연해연방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아씨, 마을 애들보담 아주 싸게 고쳐다 드리겠읍니다. 거 어디서 만들었는가요.”하고, 추근추근하게도 그 여자의 들고 있는 서양식 시계에 제 손을 대었다.
“왜 이래, 남 귀치않게.”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는 돌아선다. 니 토리는 어랍시요 하고 물러섰다.
그녀는 지나갔다. 니 토리는 원망스럽게 지나가는 이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감(豫感)은 틀리지 않았다. 바람만 내리 불던 길, 무언가 떨어뜨리고 탄식하는 듯한 손 하나이 있었다. 굉장하게긴 검을 두 자루 들고 있는걸 보면 아마 날리는 바람에 저항을 받아 떨어뜨려 날이 무뎌지거나한 눈치였다. 니 토리는 대어섰다.
“제게 맡기시랍시요.”
한동안 값으로 승강이를 하다가 오이 여섯에 검 손잡이와 칼집까지 고쳐다주기로 하였다. 검이 날카로워지매 그녀의 팔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졌고 그리고 또 칼집에 각종 <악세소리>까지 달아 돌려주니 오이는 다시금 늘어났건만 이번에는 마음조차 초조해 온다. 집의 광경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어 인제 요행을 바랄 여유도 없었다. 나무 등걸이나 무엇 같고 제 것 같지도 않은 다리를 연해 꾸짖으며 갈팡질팡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놈의 기계공이 저렇게 술이 취해가지고 이 진 땅에 어찌 가노, 라고 길 가는 사람이 걱정을 하리만큼 그녀의 걸음은 황급하였다. 흐리고 비오는 하늘은 어둠침침하게 벌써 황혼에 가까운 듯하다. 현무계곡 앞까지 다달아서야 그녀는 턱에 닿은 숨을 돌리고 걸음도 늦추잡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집이 가까와올수록 그녀의 마음조차 괴상하게 누그러웠다. 그런데 이 누그러움은 안심에서 오는 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을 빈틈없이 알게 될 때가 박두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녀는 불행에 다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리려고 버르적거렸다. 기적(奇蹟)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 집 - 곧 불행을 향하고 달려가는 제 다리를 제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으니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 다고, 구해 다고 하는 듯하였다.
그럴 즈음에 마침 계곡가 선술집에서 그녀의 친구 히나가 나온다. 그녀는 빙글빙글 도는 몸짓에 턱 아래로 묶은 녹색머리, 온 몸과 팔은 새빨갛게 옷으로 덮였거늘, 푸르딩딩한 복장을 걸친 짤막한 몸뚱이에 , 머리카락도 관자놀이 양쪽으로 마치 솔잎 송이를 거꾸로 붙여놓은 듯한 니 토리의 풍채하고는 기이한 대상을 짓고 있었다.
“여보게 니 토리, 자네 텐구 영역 들어갔다 오는 모양일세그려. 오이 많이 벌었을 테니 한 개 먹이게.”
빙글이는 땅딸보를 보든 맡에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는 몸짓과 딴판으로 연하고 차분하였다. 니 토리는 이 친구를 만난 게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다. 자기를 살려준 은인이나 무엇같이 고맙기도 하였다.
“자네는 벌써 수박이라도 걸친 모양일세그려. 자네도 오늘 재미가 좋아보이.”하고, 니 토리는 얼굴을 펴서 웃었다.
“압다, 재미 안 좋다고 뭐 뭘 먹을 낸가. 그런데 여보게, 자네 숨이 어째 물독에 빠진 새앙쥐 같은가? 어서 이리 앉아 숨 좀 돌리게.”
계곡가는 맑고 시원하였다. 흐르는 폭포수가 떨어질 적마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흰 물안개, 바위 사이로 좌르륵좌르륵 흐르는 계곡물이며, 놓여진 수박이며 꿀이며 물고기며 바람이며……가 너저분하게 내려다보이는 넓은 바위에 앉자 니 토리는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할 양이면 거기 있는 모든 먹음 먹이를 모조리 깡그리 집어삼켜도 시원치 않았다. 하되 배고픈 이는 위선 분량 많은 물고기 두 개를 쪼이기도 하고 수박을 한 조각 청하였다.
주린 창자는 음식맛을 보더니 더욱더욱 비어지며 자꾸자꾸 들이라들이라 하였다. 순식간에 물고기 두 마리를 그릇을 그냥 물같이 들이키고 말았다. 세째 마리를 받아들었을 제 시원한 사케 곱배기 두 잔이 식혔다. 히나와 같이 마시자 원원히 비었던 속이라 찌르르하고 창자에 퍼지며 얼굴이 화끈하였다. 눌러 오이 하나를 청했다.
니 토리의 눈은 벌써 개개 풀리기 시작하였다. 탁자에 놓은 오이 두 조각을 숭덩숭덩 썰어서 볼을 불룩거리며 또 곱배기 두 잔을 부어라 하였다.
히나는 의아한 듯이 니 토리를 보며, “여보게 또 먹다니, 벌써 잔뜩 먹었네, 오이가 세 개일세.”라고 주의시켰다.
“아따 이놈아, 오이 셋이 그리 끔찍하냐. 오늘 내가 오이를 막 벌었어. 참 오늘 운수가 좋았느니.”
“그래 몇 개를 벌었단 말인가?”
“삼십 개을 벌었어, 삼십 개를! 이런 젠장맞을 술을 왜 안부어……괜찮다 괜찮다, 막 먹어도 상관이 없어. 오늘 오이 산더미같이 벌었는데.”
“어, 이 캇파 취했군, 그만두세.”
“이놈아, 이걸 먹고 취할 내냐, 어서 더 먹어.”하고는 히나의 귀를 잡아채며 취한 이는 부르짖었다. 그리고 술을 붓는 쪼그마한 재액 덩어리에게로 달려들며, “이놈, 오라질 놈, 왜 술을 붓지 않어.”라고 야단을 쳤다. 재액 덩어리는 빙글 돌아 히나를 보며 문의하는 듯이 몸짓을 하였다. 주정꾼이 눈치를 알아보고 화를 버럭내며, “에미를 붙을 이 오라질 놈들 같으니, 이놈 내가 돈이 없을 줄 알고.”하자마자 허리춤을 훔칫훔칫 하더니 오이가 든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재액 덩어리 앞에 펄쩍 집어던졌다. 그 사품에 오이 몇 개가 또르륵 하며 굴러간다.
“여보게 오이 떨어졌네, 왜 오이를 막 끼얹나.” 이런 말을 하며 일변 오이를 줍는다. 니 토리는 취한 중에도 돈의 거처를 살피는 듯이 눈을 크게 떠서 땅을 내려다보다가 불시에 제 하는 짓이 너무 더럽다는 듯이 고개를 소스라치자 더욱 성을 내며, “봐라 봐! 이 더러운 놈들아, 내가 오이가 없나, 다리뼉다구를 꺾어놓을 놈들 같으니.”하고 히나의 주워주는 오이를 받아, “이 원수엣 오이! 이 육시를 할 오이!”하면서, 풀매질을 친다. 돌바닥에 맞아 떨어진 오이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도록 퍽석 하고 깨졌다.
곱배기 두 잔은 또 부어질 겨를도 없이 말려가고 말았다. 니 토리는 입술과 턱에 붙은 술을 빨아들이고 나서 매우 만족한 듯이 그 솔잎 송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또 부어, 또 부어.”라고, 외쳤다.
또 한 잔 먹고 나서 니 토리는 히나의 어깨를 치며 문득 껄껄 웃는다. 그 웃음 소리가 어떻게 컸는지 계곡가에 있는 이의 눈은 모두 니 토리에게로 몰리었다. 웃는 이는 더욱 웃으며, “여보게 히나, 내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오늘 캐머라를 고치러 텐구네 쪽까지 가지 않았겠나.”
“그래서.”
“갔다가 그저 오기가 안 됐데그려. 그래 산 입구에서 어름어름하며 손님 하나를 만들 궁리를 하지 않았나. 거기 마침 서양 아가씨이신지 시종 님이신지 - 요새야 어디 하녀와 아가씨를 구별할 수가 있던가 - <에이프론>를 두르고 시계를 보고 서 있겠지. 슬근슬근 가까이 가서 시계 고치시지요 하고 시계를 보려니까 내 손을 탁 뿌리치고 홱 돌아서더니만 <왜 남을 이렇게 귀찮게 굴어!> 그 소리야말로 꾀꼬리 소리지, 허허!”
니 톹리는 교묘하게도 정말 꾀꼬리 같은 소리를 내었다. 모든 요괴는 일시에 웃었다.
“빌어먹을 깍쟁이 같은 년, 누가 저를 어쩌나, <왜 남을 귀찮게 굴어!> 어이구 소리가 처신도 없지, 허허.”
웃음 소리들은 높아졌다. 그러나 그 웃음 소리들이 사라지기 전에 니 토리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다.
히나는 어이없이 주정뱅이를 바라보며, “금방 웃고 지랄을 하더니 우는 건 또 무슨 일인가.”
니 토리는 연해 코를 들여마시며, “우리 금고가 털렸다네.”
“뭐, 금고가 털리다니, 언제?”
“이놈아 언제는. 오늘이지.”
“엑기 미친 놈, 거짓말 말아.”
“거짓말은 왜, 참말로 죽었어, 참말로... 털린 금고를 찾지도 않아놓고 내가 술을 먹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죽일 놈이야.”하고 니 토리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운다.
히나는 흥이 조금 깨어지는 얼굴로, “원 이 캇파가, 참말을 하나 거짓말을 하나. 그러면 집으로 가세, 가.”하고 우는 이의 팔을 잡아당기었다.
히나의 끄는 손을 뿌리치더니 니 토리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싱그레 웃는다.
“털리긴 뭐가 털려.”하고 득의가 양양.
“털리긴 왜 털려, 생때같이 잠겨 있단다. 그 오라질 것이 오이를 죽이지. 인제 나한테 속았다.”하고 어린애 모양으로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 캇파가 정말 미쳤단 말인가. 나도 금고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들었는데.”하고, 히나도 어느 불안을 느끼는 듯이 니 토리에게 또 돌아가라고 권하였다.
“안 털렸어, 안 털렸대도그래.”
니 토리는 홧증을 내며 확신있게 소리를 질렀으되 그 소리엔 안 죽은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가락이 있었다. 기어이 오이 열 개를 채워서 곱배기 한 잔씩 더 먹고 나왔다. 궂은 비는 의연히 추적추적 내린다.
니 토리는 취중에도 경보기를 사가지고 집에 다달았다. 집이라 해도 물론 공방이요, 또 집 전체를 잠근 게 아니라 안과 뚝떨어진 동굴같은 곳 한 쪽에 몰아 둔 것인데 한 달에 오이 열 개씩 내는 터이다. 만일 니 토리가 주기를 띠지 않았던들 한 발을 대문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잡음(雜音) -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잡음에 다리가 떨렸으리라.
철컹거리는 기계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르렁거리는 쇳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다만 이 무덤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 깨뜨린다느니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게 하고 불길하게 하는 삑삑하는 그윽한 소리, 문이 끼익거리는 소리가 날 뿐이다. 만일 청각(聽覺)이 예민한 이 같으면 그 끼익끼익 소리는 가만히 멈춰 있을 적의 소리가 아니니 뭔가 열려 있다는 것도 짐작할는지 모르리라.
혹은 니 토리도 이 불길한 소음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 맞을 것, 주인이 들어오는데 조용히 하지를 않아, 이 오라질 것.”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 무시무시한 증을 쫓아버리려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인 까닭이다.
하여간 니 토리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난장판 - 떨어진 도면 밑에서 나온 먼지내, 닦지 않은 도구에서 나는 땀와 기름내, 가지각색 때가 케케히 앉은 옷내, 급히 흘린 버섯 썩는 내가 섞인 추기가 무딘 니 토리의 코를 찔렀다.
방안에 들어서며 경보기를 한구석에 놓을 사이도 없이 주정군은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런 오라질 것, 주야장천(晝夜長川) 삐걱거리기만 하면 제일이야! 주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금고의 뒤편을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질에 나는 소리는 통이 텅텅거리는 소리가 아니고 턱턱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이때에 끼익 소리가 한 번의 퉁 소리로 변하였다. 문짝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것도 마치 애초에 문이 아니라 판대기가 붙어 있던 게 떨어지는 양 훌쩍 떨어질 뿐이다.
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주인은 금고의 앞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빈 상자같은 금고의 몸뚱이를 붙잡아 흔들며, “이것아, 오이를 보여줘, 오이를! 입을 벌렸어, 이 오라질 것!”
“…”
“으응, 이것 봐, 아무 것도 없네.” “…”
“이것아, 털렸단 말이냐, 왜 오이가 없어.”
“…”
“으응. 또 반응이 없네, 정말 털렸나버이.”
이러다가 열린 속이 훤히 보이도록, 문이 떨어진 금고를 알아보자마자, “이 주둥이! 이 주둥이! 왜 닫히지를 못하고 열려만 있느냐, 응.”하는 말 끝엔 목이 메었다. 그러자 산 캇파의 눈에서 떨어진 닭의 똥 같은 눈물이 빈 금고의 공허한 속을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니 토리는 미칠 듯이 제 얼굴을 털린 금고한테 비비대며 중얼거렸다.
“경보기를 사다놓았는데 왜 달지를 못하니, 왜 달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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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불?)편하게 한 곳으로 모았습니다.
다음 패러디는 더 정성을 담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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