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인 12월의 어느날. 지금 밖은 흰 눈들로 수북이 쌓여 있어 온 통 새하얗다.
오늘 처럼 눈도 많이 쌓이고 추운 날에는 집 안에서 따듯한 차나 마시며 얌전히 있는 게 상책이겠지.
환상향이라는 외부와 단절 된 세계. 마법의 숲이라는 곳에 있는 작은 마법사 소녀가 사는 집에 나는 살고있다. 마법사 소녀의 이름은 키리사메 마리사.
그리고 이 몸을 소개하자면 '악마'이다.
악마라고 해서 무시무시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나는 마왕 클레스도 그 아래의 상급 악마도 그 보다 낮은 중급도 못 되는 하급 악마라서 어둠의 다크포스같은 건 전혀 풍기지 않는 단 말이다.
그래도 명불허전 악마니까 마법 같은 건 잘 부릴 거 아니냐고? 진지하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의 마법 실력을 말하자면 한 지붕에서 같이 생활하는 마법사 소녀보다도 못하다. 내 나이가 600살이 넘어가는데도 이제 10대 중반에 들어서는 소녀 보다 못하다니? 웃기지 않냐? 그런데 마법이라는 것이 종족을 떠나서 재능이 필요하더란 말이지.
나이에 비해 마법 실력이 형편없는 나는 그냥 재능이 더럽게 없는 것일 뿐이었어. 그래서 암만 시간이 흘려도 만년 하급 악마 신세★
지금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것뿐인데 이 패배감이 더럽게 드는 건 뭘까? 스스로 비하하는 것 같아서 우울해진다....
간바레 와타시!
그런 주제에 이름 하나는 거창하다. 루키드 디드 레이시스라고 중2병으로 적당히 지은 닉네임은 결코 아니다. 정진 정명한 나의 진명인 것을 어리석은 필멸자들에게 고하노라.
그리고.. 나에겐 또 하나의 인격이 있답니다. 그 이름하야 루쨩☆. 여장을 하면 튀어나오는 제 2의 인격으로 무척 카와이하답니다~ 는 개뿔.. 이건 그냥 나의 흑역사일 뿐이야!
절대 루쨩☆에 대해서 거론되지 않았으면 한다. 끔찍하니까 말이다.
만약 내가 여장을 하고 루쨩☆이 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다면 전력으로 말리고 싶다. 안구에 심각한 데미지를 입어 두 번 다시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거니까. 진짜로!
마지막으로 나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자면 ‘연결 하는 정도의 능력’이라고 추상적인 개념만 아니면 무엇이든 연결할 수 있는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능력으로 이곳 환상향에 소환되어지고 난 뒤에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나서 얻은 보배로운 힘이다.
만약, 이 능력조차 없었다면 나는 그야말로 암울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내가 이곳에 적응하며 정착하는데 크게 일조한 능력이기도 하니 말이다.
뒤에 가서는 푸념만 늘어 놓은 것 같지만 이것만으로 나의 소개는 다 끝났다고 볼 수가 있다. 충분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 불충분한 부분은 앞으로 차차 알게 될 거니 상관 없겠지.
여하튼, 본편 진행이나 하자.
*
창밖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 문을 열 엄두도 못 내고 집안에 갇혀있기를 삼일. 마리사는 한계를 보였다.
나야 오랫동안 방콕 생활을 해온 경험이 많기 때문에 이대로 봄이 올 때 까지 집안에서 빈둥대는 건 별 문제가 아니지만 마리사는 달랐다. 언젠가 필이 꼽혀 몇 날 며칠을 마법약 제조에 시간을 쏟아 부은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밖을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활발한 왈가닥 소녀이다.
평소에도 검은색 마녀복에 고깔모자를 쓰고 다녀 주위에서 흑백이라고 불리는 소녀지만 사계절 내내 그 복장을 고집하는 건 자기 나름의 아이덴티티라나 뭐라나? 그나마 겨울에는 안에 두툼하게 껴입고 있으니 나은데 여름에도 저 복장은 너무나 무더워 보인다. 본인은 문제없다고 말하지만 보는 입장에서 더워 보인다고!
아무튼, 나이에 맞게 아직 풋풋한 소녀지만 얼굴은 제법.. 아니 꽤나 귀여운 편이다. 약간 곱 슬진 금발머리에 왼쪽 구레나룻 쪽을 땋아 내린 것도 금색으로 물든 눈동자도 상당히 취향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는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마스터.
즉, 나의 주인이기도 하다. 나는 마리사라는 작고 귀여운 마법사 소녀에게 사역마로 소환되어져 이곳에서 같이 생활 하는 중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리사로부터 소환되어지고 나서 벌써 반년이 흘렸구나.
쿵쿵쿵. 나는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감상에 젖어들었다.
따끈한 코코아차가 담긴 컵을 들고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보면서 차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나름 분위기 잡고 있는데 마리사가 나를 째려보면서 날카로운 음성을 들려준다.
「야이, 너 혼자 타먹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사역마 주제에 주인 몫을 준비 안 해놓는 게 어딨어?」
미안, 네 몫도 준비해야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이렇듯 나는 사역마 답지 못한 사역마다. 비단 이것 뿐 만이 아니라 나의 평소 행실은 마리사를 주인 취급하는 게 아닌 그냥 동거인 수준으로 취급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순전히 마리사가 얼빠진 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나를 소환한 직후에 했어야 할 강제력에 대한 주술을 걸어놓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중대한 실수로 인해 나는 마리사의 말을 좀이 아닌 존 나게 안 듣는 사역마 아닌 사역마로 만들어 놨다. 뭐, 내 입장에서는 쌩큐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함 부러 대들 수 없는 노릇.
괜히 화나게 했다간 물불 안 가리고 마스터 스파크를 날려대니까 말이야.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마리사의 얼굴을 보며 조소를 흘리면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미처 생각지 못한 그녀의 몫도 타줘야 하니까 말이다.
데운 우유에 코코아 분말을 섞어 만든 따끈하고 향긋한 차가 담긴 머그컵을 마리사에게 건네줬다. 아까까지 뿌루퉁했던 표정이 달콤한 코코아의 내음과 함께 눈 녹듯이 지워졌다.
따끈한 코코아차를 한 모금 ‘홀짝’마신 마리사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럴 때 유카의 빵이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거, 나 더러 얻어 오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야,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 중에 유카와 친하게 지내는 건 너 정도니까.」
「다들 유카 씨에 대해 편견이 심하지 않아? 그렇게 친절한 요괴도 드문데.」
「친절은 무슨, 내가 전에 빵을 얻으러 갔을 때 다짜고짜 탄막을 날리더라.」
「네가 건방진 태도를 취해서 그렇겠지.」
「그래~ 넌, 그 성질 나쁜 요괴 씨에게 이쁨 받으니까 참 좋겠다.」
마리사는 비꼬는 말을 하며 입을 샐쭉 내밀었다. 마리사가 환영 받지 못하는 건 유카만이 아닐 텐데, 내가 유카와 친하게 지내는 게 부러운가? 아니, 유카의 그 맛 나는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특권이 부러운 거겠지.
나도 지금 유카의 빵이 먹고 싶지만, 이 추위에 도저히 밖을 나돌아 다닐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날이 풀릴 때 까지 참도록 해야지.
그런데 입을 내밀고는 뚱한 표정을 짓는 마리사를 보고 있으니 불쑥하고 장난기가 올라오는 게 아니겠는가. 이거,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구만. 나는 평소에도 자주 치는 성적인 농담. 음담패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화제를 꺼내기로 했다.
「심심한데 수수께끼라도 내 볼 거니까 맞춰 볼래?」
「수수께끼? 시시한 거라면 안 듣겠어.」
「무슨 소리! 오늘처럼 적막하고 할 일 없을 때 대화로 시간을 축내는 건 결코 시시한 게 아니지.」
「알았어, 너 잘났으니까 그 수수께끼란 걸 내봐.」
여전히 관심 없다는 얼굴을 보니 더 더욱 저질적인 문제를 내고 싶어진다. 마리사 이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구나. 후후후..
나는 음흉한 미소를 살며시 띄우며 입을 열었다.
「흠.. 언제나 촉촉하고 습기가 차 있는 구멍은 과연 뭘까요?」
마리사는 내가 내 준 문제를 듣자 골몰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검지로 이마를 받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 마리사에게 나는 힌트 축에도 못 드는 연상 단어들을 말한다.
「구멍. 촉촉함. 우후후후...」
물론, 음흉한 웃음을 서비스로 말이지.
그러자 무언가 깨달았는지 눈가를 찌푸리면서 얼굴을 붉히는 마리사.
「이.. 이 변태가! 또 그런 성희롱을 하는 거야?!」
그래, 저런 반응을 기대했다고!
나는 내가 내 준 문제의 답을 음란한 그것이라고 판단했을 마리사에게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
「어라아? 그러니까 답이 뭔지 안거지?」
「그...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
「입으로 말 못할게 뭐 있어?」
「넌, 나 같은 소녀에게 그런 상스런 단어를 입에 담으란 거야!」
어이쿠! 아주 요조숙녀 납셨어요.
우리 마리사쨩 부들부들 거리는 모습을 보니 왜 이렇게 재밌을까? 이러니 내가 놀려먹는 걸 관두지 않는 다니까.
그래서 좀 더 놀려 보도록 하자.
「어째서 정답이 상스런 단어라고 단정 짓는 거지?」
「그럼 아니란 말이야?」
「그래.」
「진짜? 하늘에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당연하지.」
그야 정답은 마리사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아니니까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거지.
내가 자신 있게 맹세를 하자 기세가 잦아든 마리사는 입을 오므린 채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럼.. 정답이 뭔데?」
마리사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그 시선을 지긋이 응시하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수도의 꼭지.」
「에?」
예상외의 대답에 마리사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했다.
「수도꼭지는 언제나 물방울이 떨어지고 촉촉하잖아.」
「그런데 그게 뭐야?」
「응?」
「응?이 아니잖아!」
맙소사. 나는 환상향에 아직 수도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의미 없이 성희롱 해놓고 억지를 부린 것 밖에 안 된다.
이번에 제대로 놀려 줄 수 있을까 했는데 바깥세계의 상식을 들고 오는 바람에 계획을 망치고 말았다.
마리사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부들부들 떨면서 이를 악 물고 있다. 이대로 라면 나는 ─
「이 변태자식, 죽어버려!!」
마리사의 맨손 블레이징 스타가 나의 하복부에 작렬했다.
‘커흑’거리는 단말마를 내뱉고 그대로 무릎 꿇으며 주저앉은 나는 한냐 가면 같이 무서운 마리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삼도천에 있는 사신쨩과 만나는 플래그.
마리사의 손에 들려진 미니 팔괘로가 나를 조준하고 있다. 살려 주세요 ㅠㅠ
하지만 용납 없이 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지. 그런 예측을 한 치도 비껴나가지 않고 무서운 마포가 나에게 쏘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집안에서 마포라니. 이건 너무했다. 너무했다고!!
으아아아아아악 ───── !!!
*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건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린 나는 분명 마포로 엉망이 되었을 집안이 의외로 멀쩡한 걸 보며 의문을 느꼈다. 어째서 나만 구워져서 기절 한 거야?
화력을 조절 했다곤 하나 한 방에 기절 할 정도라면 주변이 다 날라 가고도 남을 텐데. 딱 내 앉은 자리만 제외하고는 멀쩡했다.
아... 왜 이런지 기억났다. 분명 나는 무의식중으로 마리사의 마포가 나에게 만 향하도록 능력으로 연결 한 거다. 이유야 당연히 내 몸보다 마포로 인해 집안이 엉망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나도 참, 이래서야 환상향연기에 집안을 정리하는 정도의 능력이라고 쓰여 질만 하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조차 집안을 어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다니. 어떤 의미로 내 자신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까맣게 거슬린 몸을 털어내며 주변을 둘려 본 나는 마리사가 나간 것을 확인 한 후에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자세가 편안해 지니, 괜시리 지난날의 상념이 떠오른다. 내가 마리사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말이다.
지금와 생각해 보면, 그저 피식하고 웃음만 나오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의 연속이지만, 그 대부분이 자업자득이라 마음 한컨이 묘하게 아파온다. 으으.. 나 정말로 노답이었구나. 하지만 지금도 여전한걸.. 흐흐흐... 가 아니야! 이 발전없는 나!!
앞으로는 또 어떤 사고나 칠까? 하는 꼴통짓만 떠올리는 내가 지난 추억을 되새기며 이야기 해보려 한다.
나 같은 꼴통 악마가 환상향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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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로 완결 났던 마리사의 사역마 리메이크작입니다.
시작 부터 사실상 1부의 에필로그 부분.
(IP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