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계절.
문득,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백옥루의 모습 또한 절경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백옥루를 바라봐 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하루가 달리 늙어가는 내게 시간의 흐름은 문제가 되지 않기에, 딱히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나는 백옥루의 앞에서 일생을 보내고 있는 늙은 벚나무이다.
매년 봄, 내가 꽃을 가득 피우면 꽃놀이를 하러 온 인파가 몰려 시끌벅적해지곤 한다.
어린이가 뛰놀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웃거나 같이 놀거나 한다.
일년 내내 그저 백옥루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 내게, 봄에 몰리는 꽃놀이 인파는 꽤나 괜찮은 구경거리이다.
가만히 서서 같은 것을 바라보며 수개월을 보내는 것이란 아무리 오래 살아온 나라도 질려버렸으니.
나는 사람들이 좋다. 그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즐거움이 좋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허허, 꽃이 지고서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정말 볼수록 대단한 벚나무로구나. 그렇지 않느냐, 유유코야?"
발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칭찬하는, 사이교우 법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곁에는 그의 딸, 유유코라는 이름의 소녀가 서 있다. 법사의 물음에 유유코는 소리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이런 나무와 함께라면 내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겠지. 너도 나이가 들면 이런 생각이 들 거란다, 유유코."
법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사뭇 슬픈 가락을 흥얼거리다 이내 집으로 향한다.
유유코는 가만히 무엇을 생각하는 듯 서 있다가 부친의 뒤를 따랐다.
사이교우 법사가 내게 찾아오게 된 것은 결코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내게 무척이나 애착을 가진듯한 모습이었다.
가끔 나를 보며 이것저것 단카를 지으며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내 밑에서 노곤한 듯 낮잠을 취하기도 하였다.
나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그의 노래를 싫어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아껴진다는 기분 또한 나쁘지 않았다.
한 번은 조용한 꽃놀이가 하고 싶었는지, 법사가 꽃놀이를 위해 내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았다.
그럼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자, 그는 나를 보며 "사람을 끌어모으는 네 아름다움이 네 과오로구나.."하며 탄식했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정령의 형을 취하고 그의 꿈 속에 찾아가,
"내 아름다움은 자연을 따를 뿐이니, 그것을 과오라 생각하는 것은 네 인간으로서의 편견에 불과하다."
라 말하고 잠시 춤을 추며 즐기었다. 이후로 그는 내게 더 강한 애착을 갖고, 더 자주 찾아와 시간을 보냈다.
물론 더 이상 내게 오는 사람들을 막는 것도 일절 하지 않았다.
내 아래서 멋진 노래를 불러주는 법사의 덕에, 꽃이 피지 않는 계절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주었다.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유유코라는 아이를 데려온 것은 그보다 더욱 최근의 일이었다. 나는 법사의 혈육인 아름다운 유유코 또한 사랑했다.
다만 그 아이를 보자마자 주위에 날아다니는 사령을 한 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한 사령들은, 내게는 별 관심도 없이, 자신들을 보지 못하는 듯한 유유코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저런 것들과 평생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탄식했다.
그럼에도 별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다만 그녀와 법사, 그리고 모두를 위해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울 뿐이었다.
다행히, 유유코 또한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는 무척 행복했다.
법사와 유유코가 마지막으로 함께 찾아오고 몇 달이 지나서 나는 사이교우 법사와 이별을 하게 되었다.
입적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 내 곁에서 영면을 취할 수 있음에 즐거워하며.
'바라노나니 벚나무 꽃 아래서 봄날 가고파, 그 해 음력 2월 보름달 뜬 이월에.
그대 바라던 벚나무 아래서 떠나갔노라, 정토 연꽃 위에도 못 오를 리 없으리를.'
같은 시구를 가끔 흥얼거리던 법사였으니, 그야말로 가장 그다운 마지막이리라.
나를 극진히 아끼던 법사의 시신은 내 앞에 마련된 터에 매장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성스레 준비된 묏자리에 그의 시신을 매장하고 묵념한다. 유유코 또한 묵념하는 데 열중이다.
하지만 유유코가 반응하지 않아 따분해져버린 것인지, 사령은 보이지 않는다.
곧이어 나는 법사가, 나의 친구가 누워있는 곳 가까이로 최대한 뿌리를 뻗어본다.
마지막까지 흥을 잃지 않았던 그와 함께라면, 나 또한 벚꽃이 피지 않는 기간을 즐거이 보낼 수 있으리라.
밤이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갑자기 온몸을 휘감는 이 이상한 기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 내게 찾아와 주었으면 한다. 누군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었으면 한다.
누군가 나의 아름다움을 봐 주었으면 한다, 꽃이 없이도 이토록 아름다운 나의 모습을.
순수한 나의 아름다움은 오직 법사만이 알아봐 주었다. 난 항상 여기에서 모두를 바라보고 사랑해 왔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 즐겁다. 붉은 기운이 뿌리 끝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휘몰아쳐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하하하, 아하하하,
나는 모두가 내 아래에서 떠나가고파하는 벚나무가 되리라.
그 누구라도 즐거움에 취해, 나를 사랑하고 내 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게 하리라.
나는 곧 사이교우 아야카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법사가 매유되길 원했던 나무이기 때문일까?
법사가 입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사람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즐거운 노래를 듣지 못함에 실망한 것이겠지.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내 앞에 묏자리를 쓰고, 누웠다. 법사와 나와 함께 즐거움에 빠지고 싶음이겠지.
나는 법사로부터 그리 하였듯, 그들로부터 또한 붉은 기운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이고, 즐거워한다. 즐거워하고, 더 갈망한다.
나뿐 아닌 모두에게, 가히 열반에 이른 것과도 견줄법한 무한한 즐거움을 주는 그 붉은 기운을.
...
그러고보니 유유코가 나를 찾아오지 않은지 꽤 되었다.
나와 함께 있음이 즐겁지 않아진 것인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령과 함께이기에 겪게 될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그토록 노력해온 게 나이거늘.
아직 네게 보여줄 즐거움은 무궁무진하단다, 사랑하는 유유코야. 나 사이교우 아야카시는 네가 무척이나 보고 싶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온몸에 기운이 더욱 강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달콤한 붉은 기운 덕분일까, 나는 더 선명한 붉은 빛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에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줄어들기만 했다.
춤추고, 노래하고, 뛰어놀며 즐거워해야 할 사람들이. 내 아름다움에 취해 더 큰 즐거움을 느껴야만 할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난 더 많은 이들과, 더 긴 시간을 함께하기를 원했다. 나는 내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붉은 꽃잎을 떨어뜨렸다.
그들은 늦은 시간, 내게 찾아와 나와 함께하기를 청하였다.
목에서, 팔에서, 또 심장에서 붉은 기운을 흘리며, 내게 더 큰 쾌락을 불어넣어주며.
오직 사이교우 법사만이 누워있었던 내 앞에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누워있다.
그들은 나를 통해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기를 택한 현명하고, 기특하고, 또 사랑스러운 이들이다.
그들 덕택에 나는 더 즐겁게 붉은 꽃을 피우고, 그 붉은 꽃 덕분에 더 많은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
헌데 유유코야,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기다리게 할 생각이니?
보러 오너라, 나의 아름다운 꽃을. 함께 하거라, 네 부친과, 마을 사람들과, 그리고 무한한 즐거움과.
매년 붉어져갈 뿐이던 벚꽃은, 이젠 칠흑과도 같은 빛을 띠며 지기 시작한다.
아아, 이제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하고도 혼자서 빛날 새까만 꽃잎을 피우게 된 것인가? 참으로 기쁜 일이로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겠지? 참으로 즐거운 일이로다. 이 넘치는 즐거움을 나로선 어찌할 수 없을 지경이로구나.
하하하.
톡.
뿌리 근처에 팔랑팔랑 날던 나비가 한 마리 내려앉았다. 너도 즐거움을 나누려는 것이니?
기운을 나누어주었다. 나비는 금세 땅에 떨어져 움직임을 멈추었다. 역시 너도 나와 함께 하려는 것이니?
하지만 나비에게 기운을 나누어준 곳에, 작은 혹이 생겼다. 나의 무구한 아름다움에 해를 끼치려는 하는 것인가?
잘라내려 해도 잘라지지 않고, 떨쳐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기운을 모아 노력해도 허사다.
분노에 가지가 부들부들 떨려온다. 어쩔 수 없는 일이로구나.
더 많은 기운을 모아 도려내는 수밖에는.
그 때 멀리서 하늘색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다가오는 게 보인다.
그 머리는, 그 얼굴은, 유유코로구나.
반가움에 지기 시작하던 꽃이 다시 개화하기 시작한다 - 어느 때보다도 검붉게 빛나며.
어렸을 적에 온갖 사령으로 둘러싸였던 유유코에게는, 오직 하나의 사령이 곁에 있을 뿐이다.
저 사령은 나의 유유코에게 손을 대려는 괘씸한 녀석이다.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있는 힘껏 기운을 발산한다.
녀석을 유유코로부터 멀리 내쫓을 것이다 -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할 것이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유유코는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상하구나, 아버지와 나를 보고 즐거울 터, 내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다음 순간 유유코는 나를 가리키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빼어 들고선 있는 힘껏 목을 찌른다.
목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어느 것보다도 맑고도 붉은 기운이 한가득 흘러내린다.
역시 그렇지, 나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마다하는 이가 있을 리가 없다 - 사이교우 법사의 혈육이라면 더더욱 그럴 리가 없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나는 그동안 모아온 모든 기운을 꽃을 피우는 데 불어넣고, 또 하늘로 땅으로 발산한다.
유유코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해 주기 위해.
쿵.
갑자기 이루말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진다. 아까 혹이 났던 그 부분이다. 그 곳을 사령이 들이받았다.
분명 아까 다시 올 수 없도록 쫓아냈을 터였던 그 사령. 녀석이 가진 기운이, 혹의 틈새를 비집고 내게로 들어온다.
붉은 기운이 검게 변해가며 소멸하는 것을 느낀다. 붉었던 꽃은 칙칙 빛깔로 변해 떨어진다.
네 놈 따위가 내가 지금까지 모아온 즐거움을 한 번에 없애려는 것이냐? 한낱 사령 따위가?
유유코야, 이게 네 목적이었느냐? 너를 사랑하고 무한한 즐거움을 주려던 나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하하, 나는 법사의 친구로서 그의 뜻을 영원히 이어가려 했건만, 너는 내게 이런 짓을 하는구나, 괘씸한 유유코.
괘씸한 유유코야. 네년이 원망스럽다. 용서할 수 없다. 저주하리라.
너 또한 모든 것을 잃고 영원히 고통에 몸을 떨게 되리라. 보자, 고통스러워 하는 네 얼굴을...
유유코는 그저 미소짓고 있다. 즐겁지는 않은 얼굴, 하지만 무척이나 개운한 얼굴로.
헌데 붉은 기운을 모두 잃고, 꽃이 져서 추한 모습이 되어가는 내게도 느껴지는 이 해방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껏 내가 즐거움이라 생각해오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단지 그깟 붉은 기운에 취해 부질없이 요기를 발산한 것뿐이었단 말인가.
정신이 돌아온다. 나는 얼마나 긴 시간동안, 그저 백옥루를 바라보며 매년 봄 꽃을 피워왔던가?
그리고 그 아래에서 노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보며 즐거워했는가?
나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법사도 나도 무한한 즐거움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유한하기에 더 소중했을 즐거움이었거늘.
다시 유유코를 보았으나, 그녀는 아까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누워 숨을 쉬지 않는다.
잠이 온다. 나는 분명 백옥루 앞의 평범한 벚나무였을 터인데, 잠기운이 내 정신을 잠식해온다.
나는 단지 다른 나무보다 인간을 조금 더 사랑하고, 그들에게 더 오래도록 남는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미련하게도 무한을 좇으려 했다.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한 사랑도, 즐거움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유유코야, 이제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없겠구나.
고마운 유유코야, 이제는 너와도 즐거움과도 이별이로구나.
내 앞에 네 몸을 묻어다오. 내 앞에 남아 어리석은 내가 깨어나는 것을 막아 주려무나.
너도, 나도, 두 번 다시 이러한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영원히,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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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전에 써서 올렸던 네 번째 글을 약간 수정해 올렸습니다. 여전히 오글오글
사령, 인간령, 죽음(탄막)을 거쳐, 사이교우 아야카시를 주인공으로 한 글이었습니다.
전 본디 1. 설정파, 2. 작가가 아닌지라 주로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곤 하는데,
이 글에는 와카도 적어보고, 흑화하는 아야카시를 위해 중이병적인 말투도 잔뜩 넣었네요.
"본디 인간을 바라보며 꽃피울 뿐이었던 아야카시가, 사이교우 법사를 만나며 더 많은 사람과 있게 되고,
법사의 피를 마시고 요괴가 된 것을 유유코가 구해주었다." 라는 메인 플롯을 중심으로 썼는데, 역시 퀄리티가 영..
이것저것 많았던 군말을 줄이지도 못하고 양만 늘어났습니다. 죄송합니다.
읽어주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참조:
사이교우 법사와 사이교우 아야카시의 일화
http://ja.wikipedia.org/wiki/%E8%A5%BF%E8%A1%8C%E6%A1%9C
'바라노나니 벚나무 꽃 아래서 봄날 가고파, 그 해 음력 2월 보름달 뜬 이월에.
그대 바라던 벚나무 아래서 떠나갔노라, 정토 연꽃 위에도 못 오를 리 없으리를.'
http://restintouhou.tistory.com/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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