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정신을 차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풍경은 붉은 파도가 일렁이는 들판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촤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요동치는 생생한 움직임은, 마치 제게 어서 오라며 손짓하는 듯했습니다.
그 광경에 문득 섬뜩함을 느낀 저는 얼른 사람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끝없을 것만 같이 넓은 붉은 들판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허리까지 닿도록 자란 꽃에 몸을 숨기고, 낫을 벤 채 잠든 그녀의 모습에서 저는 어떠한 위험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즉시 그녀를 깨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 여기는 어디이며,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이냐고.
기지개를 펴며 일어난 그녀는 제 물음에는 하나도 답하지 않고, 씨익 웃을 뿐이었습니다.
조금 당황한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 여기는 대체 어디이며, 어째서 나는 여기로 오게 된 것이냐고.
그녀는 다시 아무 말도 없이, 베고 있던 낫을 어깨에 걸쳐메고 제게 느릿느릿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잡았습니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저는 순식간에 붉은 들판을 벗어나, 안개가 자욱한 물가에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 손을 놓고선, 물결에 잔잔히 흔들리던 낡은 조각배를 끌고 와서는, 그 위에 앉아 제게 손짓했습니다.
아까 전의 붉은 들판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두려움에 저는 강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 어느새 그녀가 제 등 뒤에 서서 저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앞에서 기이한 능력을 두 번이나 본 저는 이내 포기하고 조각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조각배가 스르르 강을 미끄러지는 동안 그녀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붉은 눈동자 가득 저를 빤히 바라보며, 느릿느릿 노를 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어째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지, 배는 어째서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건지, 작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이냐고.
그녀는 물음에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은 채, 오히려 제게 물어왔습니다 - 나는 누구이냐고.
너무도 갑작스러운 물음에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달라 하였습니다.
그녀는 다시 씨익 웃으며, 저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다시 느릿느릿 노젓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끼익, 끼익,
저는 일정하게 들려오는 노젓는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곧 제 기억을 더듬어 짚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님, 여동생 하나, 그리고 몇몇 가축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던 평범한 아들이었고, 오빠였습니다.
마을에는 종종 크고작은 요괴가 출몰하곤 했지만, 많은 화를 입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약한 장난꾸러기 요괴는 살살 달래고 어르면 될 일이었고, 악한 요괴는 마을의 퇴치사가 쫓아주면 될 일이었습니다.
요괴들의 장난에 골탕을 먹는 일도 있었지만, 웃어넘기고 이것저것 얘기하다보면 그런 것쯤은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가끔 마을 근처의 산에서 큰 불이 나기도 했지만, 다행히 많은 피해를 받지 않고 지내올 수 있었습니다.
불이 난 뒤에는 더 건강한 나무들이 생겨났고, 불로 인한 피해는 마을사람들은 서로서로 도우면 될 일이었습니다.
가끔 불에 휘말려 다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 기뻐했고, 아름다운 산을 보며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가족들과 기르는 동물들이 배를 곯지 않도록, 웃음을 잃지 않도록 매일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행복했습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가족과, 가축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종종 나타나던 요괴는 시나브로 종적을 감추더니, 어느 순간부터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끔 장난도 치고, 인간으로서 답하기 어려운 문제에 어떠한 대가도 없이 조언을 해주는 친구를 잃게 되었습니다.
퇴치사는 마을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가족들과 가축은 건강했고, 저는 행복했습니다.
조금은 특별한 친구를 잃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산불이 나곤 했지만 아름다웠던 산은 점점 나무를 잃더니, 결국에는 안타까운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산을 터전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고향을 등진 채 마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또한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마을이 조금씩 웃음을 잃어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이기에 행복하다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 모르는 사람들이 들이닥쳤습니다 - 일하는 데 쓰이는 게 아닌, 사람을 해하기 위한 칼로 무장한 채로.
그들은 위협하며 저희가 가진 것들을 요구했습니다. 가축들을 데려가고, 소중한 기억이 담긴 것들을 막무가내로 가져갔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그들을 저지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제 부모님께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데려온 개들은 부모님을 물어뜯어 몸 여기저기서 피가 나게 했고, 보다 못한 동생은 그들을 말리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축, 패물뿐이 아닌 여동생까지 끌고갔습니다. 더 이상 저는 행복한 오빠일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과 딸을 잃게 되신 부모님은, 설상가상으로 처음보는 병에 걸려 앓게 되셨습니다.
저는 온힘을 다해 극진하게 보살펴드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웃음을 잃으신 채 시름시름,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을을 해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 행복한 오빠, 혹은 행복한 아들 어떠한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웃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잃어버린 저는 결심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던 이들의 복수를 하다가 후련하게 죽을지언정, 보고만 있지는 않겠노라고.
결심이 선 날 밤, 가슴에 칼을 품은 채 저는 약탈을 하던 이들을 몰래 뒤쫓았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갖가지 향과 등롱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으리으리한 고택이었습니다.
저는 담 바깥에서 모두가 잠들기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집안 곳곳을 조용히 들쑤시던 저는 이윽고 가장 큰 방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이라면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방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살폈습니다. 마을에서 보이던 것들과 요괴의 뿔 등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윽고 이부자리를 찾은 저는, 머리맡에 칼을 겨눈 채 조심히 이불을 들추었습니다.
남의 행복을 짓밟고, 자신만 온갖 것을 누리려 하는 자의 얼굴을, 그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봐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 곳에는 잠이 든 남자가, 아들과 딸로 보이는 천진한 얼굴을 한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전 분명히 복수귀가 되기로, 그렇게 후련하게 죽기로 마음먹었을 터인데, 칼을 든 제 손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잠들어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제 가족의 허상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가족을 찌를 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멈추었습니다. 제 이런 모습이 너무도 분하고, 너무도 원망스러웠습니다.
저로서는 그를 용서할 수 없지만, 복수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아, 하릴없이 그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때 복도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발소리의 주인을 확인했습니다.
끌려간 제 동생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그만 큰 소리를 내며 동생을 끌어안았습니다.
동생도 저를 반겨주었으나, 그건 이미 동생이 놀라 비명을 지르고 난 뒤였습니다.
다음 순간 제 등에 화살이 날아와 꽂히고, 칩입자를 잡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의 발소리와 개 짖는 소리 따위가 들렸습니다.
저는 동생을 잃고 싶지 않아, 그 아이를 힘껏 밀고서 어서 반대편으로 도망가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금세 다른 화살이 날아와 동생의 가슴을 관통했습니다. 저는 허탈함에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기다렸습니다. 이 천치와도 같은 원망스러운 저를 처단해 줄 무언가가 오기를.
소중한 누구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평범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너무도 너무도 미련하고 아둔한 사람을 데려갈 무언가를.
저는 고개를 들어, 아직도 붉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찬찬히 노를 젓는 여성을 쳐다보았습니다.
노를 젓는 그녀의 모습에선 어떠한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늑장을 부리는 듯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제가 대답하기만을, 일정하게 노를 저으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렇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해 줄 때까지.
이윽고 저는 입을 떼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 나란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고,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세상의 어떤 이로부터 원망받아도 억울할 수 없을 천치와도 같은 악인이라고.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다시 물어왔습니다 -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결말을 맞기를 원하냐고.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고, 대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소중한 것들을 전부 잃게 될 때까지 미련하게 있다가, 제 마지막마저도 누군가에게 처단되기를 바랐을 뿐인 제가
그런 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씨익 웃으며 품 속에서 동전을 꺼내어 제게 던지며 그게 제 뱃삯이라 말했습니다.
상처가 가득하지만 더러워지지 않은 동전 하나. 저는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구나 하는 마음에 눈을 감았습니다.
지금 저는 시비곡직청이란 문패가 걸린 큰 건물 앞에, 어깨에 낫을 멘 붉은 머리의 여성과 함께 서 있습니다.
그녀가 제 등을 떠밉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자 시비곡직청 안의 사람들이 저를 데려가기 위해 나오고 있습니다.
저항이 무의미함을 알고 있는 저는 순순히 그들의 말에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바라본 그녀는 또다시 웃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씨익 웃어온 것과는 달리, 단지 흔들림 하나 없는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시비곡직청의 문패를 바라봅니다. 후,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시비곡직청의 사람들을 따라 저는 발길을 옮깁니다.
그녀가 노를 저었던 것처럼 천천히, 하지만 얼굴엔 망설임 없는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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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사항:
- 시제나 문체 등에 있어서 부자연스러웠던 몇몇 문구를 수정했습니다.
- 끌려간 여동생의 행방이 묘연해져버려서, 여동생과 재회한 뒤 이별하는 부분을 추가했습니다.
- 기다린다는 것의 의미가 왠지 중요해진 것 같아, 해당 단어를 삭제했습니다.
- 코마치가 던진 동전의 묘사를 약간 달리 해서 주인공의 상황에 더 비슷하게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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